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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 미·중 수교 발표 11일 뒤 특사 보내 대만 달래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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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7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17〉 

1978년 12월 27일 밤 10시 참모총장과 함께 크리스토퍼(왼쪽 둘째) 일행을 마중 나온 첸푸(오른쪽 둘째). [사진 김명호]

1978년 12월 27일 밤 10시 참모총장과 함께 크리스토퍼(왼쪽 둘째) 일행을 마중 나온 첸푸(오른쪽 둘째). [사진 김명호]

1978년 12월 16일 토요일 새벽 3시, 비서 쑹추위(宋超瑜·송초유)가 장징궈(蔣經國·장경국)를 깨웠다. “미국대사 운저가 급히 만나고 싶어한다.” 황급히 달려온 외교부 차장 첸푸(錢復·전복)가 장에게 보고했다. “미국과 중공의 수교선언이 임박했다.” 잠시 후 운저가 도착했다. 쑹의 구술을 소개한다. “운저는 총통을 만날 때마다 공사 윌리엄 브라운을 대동했다. 처음 보는 사람을 정치참사라 소개하며 이유까지 설명했다. ‘필리핀에서 수술받은 부인을 간호하기 위해 브라운은 타이베이에 부재 중이다.’ 총통은 브라운과 친분이 두터웠다. 입장이 난처해진 브라운이 자리를 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통의 거실로 이동하는 운저의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미국대사, 새벽 3시에 대만 총통 설득

미·중 수교 발표 후 카터를 비난하는 대만시위대. [사진 김명호]

미·중 수교 발표 후 카터를 비난하는 대만시위대. [사진 김명호]

운저가 장징궈에게 방문 목적을 설명했다. “오전 10시, 카터 대통령이 미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합의 내용을 직접 발표한다. 1월 1일, 미국과 중공의 정식 외교관계가 시작되고 귀국과의 외교관계는 단절된다.” 배석했던 첸푸의 회고록에 이런 구절이 있다. “카터는 미국과 자유중국의 실질적인 관계와 민간교류는 보장했다. 공동방어조약은 폐기하되 다른 조약은 계속 유효하다는 묘한 태도였다. 무기 판매도 1년만 중지하겠다며 총통을 설득했다. 자유중국의 안전과 번영, 자립과 자강 정신을  높이 찬양했다.” 운저는 카터가 발표할 내용과 미국과 대륙이 서명한 공동선언 사본까지 보여주며 신신당부했다. “카터의 성명이 나오기 전까지 비밀을 유지해 주기 바란다. 미국의 상·하원에는 보수세력들이 많다. 대만에서 먼저 발표하면 카터의 입장이 난처해진다.”

듣기만 하던 장징궈가 입을 열었다. “중화민국과 미국은 오랜 기간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단교(斷交)라는 중대한 결정을 7시간 전에 우리측에 알려줬다. 심히 유감이며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대만의 안전과 계속된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카터의 말은 실현이 불가능하다. 중화민국은 미국의 충실한 동맹국이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공산당은 절대 미국의 동맹국이 될 수 없다. 후회할 날이 온다. 나는 국정의 최고 책임자다. 정부와 국민에게 알릴 의무가 있다.” 운저는 10시 이후에 하라고 애원했다. “미국에도 이 일을 아는 사람은 국무장관 밴스와 안보보좌관 브레진스키 외에는 없다.” 장은 한마디 남기고 자리를 떴다. “카터는 우리 국민에게 타격을 가하고 나를 모욕했다. 내가 국민에게 설명할 기회도 용납하지 않았다. 나는 중화민국 총통이다. 국민의 안전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하겠다.” 운저는 3시30분에 총통관저를 떠났다. 집무실에 자리한 장은 전 총통 옌자간(嚴家淦·엄가감)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전 10시, 미국이 단교를 선언한다. 원로들을 진정시키고 의견을 취합해주기 바란다.” 장징궈가 지정한 당과 정부요인들의 집에 전화벨 소리가 요란했다. “총통이 찾는다. 편한 복장에 택시를 이용해라.”

1978년 12월 16일, 수교 선언 후 축배를 드는 덩샤오핑과 주중 미국연락사무처 주임 우드콕. [사진 김명호]

1978년 12월 16일, 수교 선언 후 축배를 드는 덩샤오핑과 주중 미국연락사무처 주임 우드콕. [사진 김명호]

총통관저에서 긴급회의가 열렸다. 외교부장이 회의 소집 이유를 설명했다. “6시간 후, 미국이 중공과 수교를 선언한다. 우리도 성명을 내야 한다. 신속히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를 열어 대책을 논의하자. 진행 중인 국민대회 대표와 입법위원 선거는 뒤로 미루자. 외교부장은 책임지고 사직한다.”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합의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성명서는 첸푸가 영어와 중국어로 작성한다. 오전 7시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를 소집한다.” 선거 연기는 찬반이 팽팽했다. 중앙상무위원회는 1주일 후에 열릴 선거를 만장일치로 중지시켰다. 외교부장 인책은 만류했지만 고집을 꺾지 못했다.

오전 10시, 장징궈는 위성으로 카터의 선언을 시청했다. “1979년 1월 1일,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승인한다. 대만과 외교관계를 중지하고, 미국과 중화민국이 체결한 공동방위조약도 중지한다. 교역과 문화교류는 계속 유지한다.” 그날 밤 장이 직접 TV에 모습을 드러냈다. “미국이 조약을 위배했다. 자유 세계에 불리한 일을 자초했다. 중화민국은 절대 중공 비적들과 담판하지 않고 대륙광복의 신성한 사명을 포기하지 않겠다. 국민은 안심하고, 모든 공직자는 노력을 배가(倍加)하기 바란다.” 장은 현실을 인정하고 인재를 존중하는 지도자였다. 행정원장에게 지시했다. “공산 비적들은 30년간 미국과 등을 졌다. 지금 미국에는 성공한 화교들이 각 분야에 널려 있다. 미국에서 자리 잡은 중년의 화교들은 특징이 있다. 중화민국이 대륙을 통치하던 시절 미국유학 떠난 인재들이 대부분이다.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은 교육과 과학에 관심이 많다. 미국과 수교 후 미국유학을 개방하고, 화교 과학자 영입에 광분할 것이 분명하다. 큰 부자 한 명이 천 명을 먹여 살리는 시절은 끝났다. 수천만의 살림을 책임질 반도체 전문가를 미국에서 물색해라. 행정원장 쑨윈쉔(孫運璿·손운선)은 장쭝머우(張忠謀·장충모)를 낙점했다. 6년간 공을 들였다. 1985년, 장은 54세의 나이에 대만으로 이주했다. 2년 후 그 유명한 타이지덴(臺積電·tsmc)을 설립했다.

장징궈, 직접 TV에 나와 대국민 연설

카터의 단교선언 후 대만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해 질 무렵, 청년들이 떼를 지어 미국 대사관으로 몰려갔다. 돌을 투척하고 계란을 집어 던졌다. 대사관을 지키던 미 해병대는 최루탄과 곤봉을 동원해도 역부족이었다. 외교부에 조심스럽게 항의했다. “폭도들이 조직적이다. 국민당 외곽조직 구국단(救國團)이 배후에서 획책했다는 근거가 발견될까 우려된다.” 효과가 있었다. 대사관 문전에 적막이 감돌았다. 대신 인도차이나 반도가 들썩거렸다. 호찌민 사후 소련에 의존하던 베트남은 중공과 미국의 수교에 눈살을 찌푸렸다. 12월 25일 새벽, 중공과 가까운 캄보디아를 공격했다. 순식간에 프놈펜을 점령해 덩샤오핑과 카터를 놀라게 하였다.

카터는 대만을 토닥거렸다. 12월 25일 오전, 운저가 외무부로 첸푸를 방문했다. “국무차관 크리스토퍼가 인솔하는 특사 일행이 27일 밤 타이베이에 도착한다.” 보고를 받은 장징궈가 첸푸에게 지시했다. “네가 영접해라. 담판도 주도해라.” 첸푸를 발탁한 이유는 명확했다. 모친의 교육이 추상같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첸의 회고를 소개한다. “흔히들 어린 시절 회상하며 엄부(嚴父)와 자모(慈母)로 시작하는 것이 기본이다. 우리 집은 반대였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나무란 적이 없었다. 모친은 무시무시했다. 밥 한 톨만 흘려도 회초리 맞고, 복장이 단정하지 않아도 벌을 줬다. 전교 일등만 해도 칭찬 한마디 들어본 적이 없다. 남과 다투기라도 한 날은 협상할 줄 모른다며 날벼락이 떨어졌다. 나는 외교관이 된 후 모친의 고마움을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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