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덩샤오핑, 카터와 비밀회담 후 귀국해 베트남 공격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79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19〉

문화협정에 서명하는 카터와 덩샤오핑. 1979년 1월 31일, 백악관. [사진 김명호]

문화협정에 서명하는 카터와 덩샤오핑. 1979년 1월 31일, 백악관. [사진 김명호]

개혁은 별것 아니다. 개방하면 저절로 되는 것이 개혁이다. 중국의 개혁과 개방은 1979년 1월 1일 미국과의 외교관계 정상화로 시작됐다. 3주 후 중공 부주석 겸 국무원 부총리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이 미국을 방문했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진동시킨 대형 사건이었다. 중공 지도부는 덩의 안전을 우려했다. 부주석 천윈(陳雲·진운)은 잠을 설칠 정도였다. 간부들에게 옛일을 회상했다. “항일전쟁 승리 후 마오 주석이 충칭(重慶)에 가서 장제스(蔣介石·장개석)와 담판했다. 장은 우리 당원들을 많이 학살했다. 동지들은 안전을 이유로 주석의 충칭행에 동의하지 않았다. 주석이 우리를 설득했다. ‘장제스가 내전 중지를 위한 평화회담 하자며 세 번 전보를 보냈다. 안 가는 건 예의가 아니다. 장은 공개적으로 나를 초청했다. 응하지 않으면 외부에 나쁜 인상을 준다.’ 주석은 안전을 책임진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동지와 경호원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담판을 마치고 돌아왔다.”

덩, 경호원은 8명만 데리고 미국 방문

덩샤오핑의 미국 방문 8일간 등이 가는 곳마다 미국 화교들의 반대 시위가 줄을 이었다. 큰 불상사는 없었다. [사진 김명호]

덩샤오핑의 미국 방문 8일간 등이 가는 곳마다 미국 화교들의 반대 시위가 줄을 이었다. 큰 불상사는 없었다. [사진 김명호]

천윈이 경호 담당자에게 당부했다. “미국 정부가 우리를 초청했다. 양국 국민의 우호와 왕래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인구 반 이상, 1억여 명이 총기를 소지한 나라다. 링컨, 카필드, 매킨리, 케네디 등 4명이 암살당하고, 잭슨, 루스벨트, 트루먼 외에 포드 대통령도 자객의 습격을 받았다. 당과 인민이 덩샤오핑 동지의 안전을 주시한다. 진심진력(盡心盡力)해라. 여자라고 방심하지 마라. 포드는 여자 자객에게 목숨을 잃을 뻔 했다.”

정보기관이 보고서를 작성했다. “대만 측에서 덩샤오핑 동지의 암살을 획책한다. 이탈리아 출신 킬러를 고용했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미국 화교와 대만 정부 유학생 중에도 위험분자가 많다. 1972년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은 수행원 중 100명이 보안요원이었다. 우리도 대등한 숫자의 경호단을 파견할 필요가 있다.” 보고를 받은 덩은 생각이 달랐다. “우리가 미국을 얼마나 믿는지 보여줄 기회다. 경호는 미국 측에 일임해라. 내 신변은 중앙경위국 요원 8명이면 족하다.”

1980년 레이건에게 패한 카터는 중국을 방문해 국빈대접 받으며 유람을 즐겼다. 1981년 8월 28일, 시안(西安). [사진 김명호]

1980년 레이건에게 패한 카터는 중국을 방문해 국빈대접 받으며 유람을 즐겼다. 1981년 8월 28일, 시안(西安). [사진 김명호]

덩샤오핑의 직급은 부총리였다. 미국은 예우에 고심했다. 카터가 한마디로 단언했다. “중국의 최고 지도자다. 최상급 국가원수로 예우해라. 예포와 3군 의장대 사열도 당연하다. 1월 28일 오후 4시 30분, 앤드류스 공군기지에 도착한 덩샤오핑은 부통령 먼데일, 국무장관 밴스, 대통령 안보보좌관 브레진스키와 악수를 하고 블레어하우스로 직행했다. 블레어하우스에 몸을 푼 덩은 쉴 틈이 없었다. 대표단 일행과 통역만 대동하고 워싱턴 교외의 브레진스키 집으로 갔다. 90년대, 주중대사를 역임한 전 미국연락처 주임 로이가 구술을 남겼다. “도착 첫날 덩샤오핑은 심상치 않은 외출을 했다. 사적인 감정이 아닌, 정치적 의미가 다분한 만찬이었다. 다음 날 열릴 덩과 카터 회담의 예행연습이나 마찬가지였다.”

덩·브레진스키 소련산 보드카로 건배

1979년 1월, 타이베이의 외교부 앞에서 카터의 야비함을 비난하는 시민. 한동안 비슷한 일이 계속됐다. [사진 김명호]

1979년 1월, 타이베이의 외교부 앞에서 카터의 야비함을 비난하는 시민. 한동안 비슷한 일이 계속됐다. [사진 김명호]

브레진스키의 부인 에밀리는 스테이크와 감자 요리를 준비했다. 딸 셋이 음식을 직접 날랐다. 브레진스키가 건배를 제의하며 덩샤오핑에게 물었다. “카터는 귀국과의 수교가 국회에서 말썽을 부릴까 우려했다. 중국에도 그런 일이 있습니까?” “있다”고 하자 다들 덩을 주목했다. “대만에 그런 사람들이 많다.” 의미심장한 대답에 폭소가 터졌다. 만찬 기간 덩은 자신의 청년 시절을 회상했다. 16세 때 아버지 따라 처음 가보는 지방에서 배를 탔다. 여러 날 만에 낯선 도시의 항구에 도착했다. 큰 배로 갈아타고 프랑스로 갔다. 1차 세계대전 말엽이었다. 청년들이 전쟁터에 나가는 바람에 일손이 모자랐다. 낮에는 군수공장에서 일하고 밤에 학교에 다녔다. 당시 나는 어렸고 불어도 할 줄 몰랐다. 싸구려 임금에 항상 배를 곯았다. 말을 못하다 보니 눈에 의존했다. 프랑스와 유럽의 국가들에 비해 중국이 형편없이 낙후된 나라라는 것을 눈을 통해 알게 됐다. 중국 학교에서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중국이 위대한 국가라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깨닫자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울해서 엉엉 울었다. 공산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됐다. 혁명을 통해 중국을 현대화시키겠다는 것이 유일한 이유였다. 군인은 직설적이다. 마오 주석과 저우 총리는 군인이었다. 나도 이념보다 실용에 충실한 군인 출신이다. 브레진스키가 다시 건배를 청했다. “브레즈네프가 소련대사를 통해 보내준 보드카다. 오늘 다 마셔버리자.” 헤어질 무렵 덩샤오핑이 브레진스키에게 다가갔다. “정식 회담 외에 대통령과 단둘이 만날 기회를 만들어주기 바란다.” 보고를 받은 카터가 이유를 물었다. 브레진스키의 대답은 간단했다. “내게 말하지 않았다. 베트남 문제 때문이라는 추측이 든다.”

얘기는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0년 중·소관계가 종을 쳤다. 소련은 중국과 맺은 협약 100여 개를 휴짓조각으로 만들었다. 중국에 가 있던 소련 기술자를 철수하고 중요 설비를 월맹으로 이전시켰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월맹은 하루가 다르게 강해졌다. 1975년 통일을 실현했다. 소련과의 우호 증대를 위해, 호찌민 생존 시절 형님으로 모시던 중국을 우습게 보기 시작했다. 화교들을 중국 간첩 취급했다. 150만 명을 추방해버렸다. 중국 국경지대에서 군사충돌도 서슴지 않았다. 중국의 군사력은 베트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베트남을 공격하려면 소련이 문제였다. 덩샤오핑은 미국의 속내가 궁금했다. 미국 방문을 결정한 가장 큰 이유였다.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덩샤오핑은 베트남 공격을 단행했다. 카터와 단독으로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아직 미궁이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