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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자동개입 ‘인계철선’ 없었다…외로운 우크라, 러는 짓밟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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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우크라이나가 1991년 독립 이후 최대의 국가적 고난에 직면했다. 초강대국과 일대일로 맞붙기 불가능한 국면에서 차선으로라도 인계철선(trip wireㆍ引繼鐵線)을 확보하지 않으면 언제든 힘의 논리에 짓밟힐 수 있다는 냉엄한 현실이 우크라이나에서 드러났다. 블라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수도 키예프가 함락 위기를 맞은 25일 새벽(현지시간) 정장이 아닌 사복 차림에 턱수염도 깎지 않은 초췌한 모습으로 국민 앞에 등장했다. 그는 러시아의 공격으로 “군인과 민간인 137명을 잃었다”며 “부상자는 316명이 나왔다”고 발표했다.

“홀로 싸우고 있다”는 우크라이나

그는 이어 “우린 홀로 남겨져 나라를 지키고 있다”며 “누가 우리와 함께 러시아에 맞서 싸울 준비가 되었는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누가 우크라이나에 나토 회원국 자격을 보증할 것인가. 모두가 두려워한다”고 토로했다.

이날 연설 장면은 러시아의 침공 직후 전쟁을 위해 우크라이나의 모든 장비와 역량을 동원하는 국가 총동원령을 선포한 뒤 공개됐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얘기한 대로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우크라이나를 도울 군사적 개입에는 선을 긋고 있다. 당초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침공의 이유 중 하나로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을 거론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미국 주도의 NATO에 가입하면 자신들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운 것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5일 새벽 대국민 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5일 새벽 대국민 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나토, 참전엔 선긋기 

그런데 정작 전쟁이 시작되자 미국과 NATO는 대러시아 제재를 강화하면서도 군사적으로는 참전 불가 입장을 연이어 밝혔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4일(현지시간)“독일에 미군 병력 7000명을 추가로 파병하겠다”고 밝히면서도 “미군이 우크라이나에 들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옌스 트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 역시 “우크라이나에 NATO군을 파견할 계획이 없다. 우리가 하는 일은 방어적인 것”이라며 군사적 참전에서 발을 뺐다.

대신 미국과 NATO는 독일ㆍ폴란드 등 NATO 회원국을 중심으로 전력을 증강하며 일종의 ‘방화벽’을 쳤다. 우크라이나가 위기를 맞았는데 미국과 서유럽은 우크라이나 바깥에서 ‘넘어오지 말라’며 병력을 추가하는 모양새다.

우크라이나 경찰당국이 제공한 위의 사진에 따르면 러시아 군용 헬기들이 24일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예프의 외각 상공에서 대형을 갖춰 날아가고 있다.[AP=연합뉴스]

우크라이나 경찰당국이 제공한 위의 사진에 따르면 러시아 군용 헬기들이 24일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예프의 외각 상공에서 대형을 갖춰 날아가고 있다.[AP=연합뉴스]

그러다 보니 이번 침공은 러시아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전개되는 양상이다. 러시아 국방부는 침공 첫날인 24일 “우크라이나군 시설 83곳을 무력화했다”고 발표했다. 푸틴 대통령은 24일 새벽 침공을 선언하며 “우크라이나 점령 의사는 없다”고 해 일각에선 국지전 아니냐는 기대감도 나왔지만 전혀 아니었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의 남ㆍ북ㆍ서쪽 방면에서 동시에 진격하며 거점을 장악하자 군사력에서 절대적 열세에 몰린 우크라이나는 속수무책이다. 러시아군은 개전 9시간 만에 수도 키예프 턱밑까지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25일 “러시아 병력이 거의 모든 방향에서 진격을 저지당했다”고 주장했지만, 러시아의 공격은 계속됐다. 외신들이 전하는 현지의 영상에는 우크라이나군의 반격 장면은 등장하지 않고 있다. 개전 이전 우크라이나 주민들이 소총을 들고 “우리 땅은 우리가 지킨다”며 결사항전의지를 불태웠지만,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국경경비대의 저항이 없었다고 알리고 있다.

인계철선 존재 땐 침공 쉽지 않아 

이처럼 러시아의 침공과 개전 초기 상황에서 드러난 우크라이나의 ‘외로운’ 저항은 근본적으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일방적인 국력·군사력 차이에 기인하지만 동시에 우크라이나의 약점을 보완할 인계철선의 부재 때문이기도 하다. 인계철선은 침입하는 적들이 건드리면 폭발물이나 조명탄ㆍ신호탄 등을 터뜨려 살상하거나 적의 침입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철선이다. 한반도에선 북한군이 남한을 공격했을 때 미군도 함께 공격받으면서 미국의 자동개입을 촉발하는 장치를 뜻한다. 즉 남침 가능성을 줄이는 전쟁 억제력이자 전쟁 발발 시 공격군을 격퇴할 대응 전력의 개념이 인계철선이다. 이게 우크라이나엔 없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하루 앞둔 지난 23일 친러 반군이 장악한 도네츠크인민공화국으로 향하는 러시아 로스토프주의 도로에 러시아군 트럭이 도열해 있다.[AFP=연합]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하루 앞둔 지난 23일 친러 반군이 장악한 도네츠크인민공화국으로 향하는 러시아 로스토프주의 도로에 러시아군 트럭이 도열해 있다.[AFP=연합]

전직 군 고위 관계자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는 계획을 작성하며 미국의 참전 가능성을 변수로 생각했을 것”이라며 “현재 상황에선 미국이 참전할 수 있는 근거와 장치(인계철선)가 없는 상황에서 자칫 3차 세계대전으로 확산될 수 있는 전쟁에 미국이 나서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 게 침공을 결정한 배경 중 하나로 보인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가 미국 등 러시아에 맞설 수 있는 나라들과 군사동맹을 맺었거나 자국 땅에 미군이나 나토군이 있었다면 시작도 전개도 쉬운 전쟁이 아니었을 것이란 설명이다.

미국과 우크라이나는 상호방위조약 등 미군의 자동 참전 장치가 없다. 우크라이나는 또 아직 자격을 갖추지 못해 NATO에 가입하기 전이어서 NATO군 역시 나서기 어렵다. 고재남 유라시아정책연구원장은 “나토와 EU에 가입하려면 법치, 인권, 언론 자유 등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일정한 조건을 갖춰야 하는 데 91년 소련 해체 후 이제 막 탈공산화한 동유럽 국가는 신생 국가로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아 가입 조건에 미비했다”고 설명했다. 이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등 가장 먼저 탈공산화했던 동유럽 국가들은 나토에 가입하는 데 우크라이나는 독립 이후 친러와 친서방으로 정권 교체가 이어지면서 사회 혼란이 극심했다는 것이다. 이후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과 돈바스 내전으로 나토 가입 요건(내전국 배제)을 갖추지 못했다.

결국 미군이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도울 결심이 있다면 6ㆍ25전쟁 때처럼 유엔군을 구성해야 한다. 그러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전쟁에 나선 만큼 안보리 차원에서 논의조차 쉽지 않다. 즉 우크라이나 스스로 러시아에 맞서거나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얘기다. 전봉근 국립외교연구원 교수는 “미국은 자국 영토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거나 동맹국에 인계철선을 설치한다”며 “특히 강대국끼리 부딪치면 핵전쟁으로 간다는 걸 알고 있는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인계철선을 제공하긴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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