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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토 막으려 우크라 먹겠다는 푸틴…'동진 저지선' 지정학 비극

중앙일보

입력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외곽의 도로에서 군용 차량이 달리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외곽의 도로에서 군용 차량이 달리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를 통일 독일의 동쪽 지역으로는 확장하지 않는다.' 1990년 독일 통일 과정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미국으로부터 구두로 약속받은 내용이다.

블리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연례 기자회견에서 “서구 사회가 1990년대 동유럽으로 1인치도 확장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나토는 뻔뻔하게 다섯 번이나 우리를 속였다”고 말한 것도 이를 염두에 둔 것이다. 다섯 번이란 1999년을 시작으로 2004·2009·2017·2020년의 나토 확장을 가리킨다.

24일(현지시간) 푸틴이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을 감행한 것은 무력을 써서라도 나토와 서방이 이런 약속을 지키게 만들겠다는 선포다. 나토의 동진을 막기 위한 저지선을 우크라이나에 그은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연합뉴스

‘강대국의 화약고’…지정학적 비극 

실제 그는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 서방에 위기 해소 조건으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금지와 비무장화를 내걸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국기 앞에 배치된 체스말들. 연합뉴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국기 앞에 배치된 체스말들. 연합뉴스

옛 소비에트연방공화국 영토 중에서도 푸틴이 이처럼 우크라이나에 집착하는 건 지정학적 요인이 크다. 우크라이나는 유럽과 아시아의 길목이자 흑해 연안에 자리한 요충지다. 과거부터 서구 열강은 우크라이나를 동방 진출의 교두보로, 러시아는 흑해를 거쳐 지중해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로 봤다. 이 때문에 대북방전쟁, 나폴레옹전쟁, 크림전쟁, 제1·2차 세계대전의 전장이 돼 '강대국의 화약고'로 불렸다.

미국 외교의 거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저서 『거대한 체스판』에서 “우크라이나를 잃은 러시아는 유럽에서 멀어져, 더 아시아에 가까운 나라가 된다”며 “러시아가 유럽의 일부인지, 아니면 유라시아의 추방자인지 결정하는 축이 바로 우크라이나”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크림반도 영토분쟁.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크림반도 영토분쟁.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우크라이나가 지니는 경제적 가치 또한 높다. 기름진 흑토 ‘체르노젬’으로 이뤄진 평원에서 전 세계 수출량의 20%에 이르는 밀을 수확한다. 철광석과 석탄 등 지하자원도 풍부하다.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야심가 푸틴에게 우크라이나는 여러 모로 포기할 수 없는 땅이다.

우크라이나의 밀밭. 비옥하고 드넓은 우크라이나 평원에서 전 세계 밀 수출량의 20%를 수확한다. 연합뉴스

우크라이나의 밀밭. 비옥하고 드넓은 우크라이나 평원에서 전 세계 밀 수출량의 20%를 수확한다. 연합뉴스

'원래 우리땅' vs '전혀 다른 나라' 인식차

지난 21일 푸틴 대통령은 길고 열정적인 TV 연설을 통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일부"라고 강조했다. 실제 9세기 우크라이나 땅에 세워진 첫 국가인 키예프루스는 벨라루스·러시아까지 아우르는 곳이었다. 동슬라브의 종가(宗家)가 우크라이나 셈이다. 13세기 키예프루스가 몽골에 멸망한 뒤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은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성장한 분가(分家)가 러시아다.

이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동생의 나라로 여겨왔지만, 우크라이나는 생각이 다르다. 키예프루스 멸망 뒤에도 여러 제국에 의해 분할 점령당하며 러시아와는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가진 다른 나라가 됐다고 주장한다.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홀로도모르 추모비 앞에선 젤렌스키 대통령 부부.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홀로도모르 추모비 앞에선 젤렌스키 대통령 부부. 연합뉴스

이에 더해 1654년 제정 러시아 때부터 1991년 소련 해체까지 340여 년간 러시아의 지배를 받으며 우크라이나 내에는 ‘러시아 포비아(공포증)’마저 생겼다. 특히 1932~33년 소련의 스탈린은 ‘농장 집단화’라는 명목으로 우크라이나를 수탈, 대기근으로 3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홀로도모르(기아로 인한 치사)라 불리는 비극이다.

우크라 '정치적 무능'도 위기 자초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 병합에 이어 8년 만에 또 푸틴의 탱크에 짓밟히게 된 것은 우크라이나의 전략적 판단 실패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독립 국가 출범 이후 친러·친서방 정부가 교차 집권하며 양극단을 오가는 분열적 정책을 펼쳤다. 국가가 사분오열되고 경제는 추락했다. 2004년 오렌지혁명 등을 거치며 친서방 정권이 자리잡았지만, 여전히 안보는 서방에, 경제는 러시아에 의존하는 식으로 줄을 탔다.  

유럽-러시아 간 가스관.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유럽-러시아 간 가스관.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이는 1994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미국, 영국 등과 함께 했던 핵 포기 결정(부다페스트 양해각서)마저 패착으로 귀결시켰다. 당시 미국·러시아·영국·프랑스는 우크라이나의 핵 포기를 조건으로 안전 보장을 약속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오락가락 정책으로 인해 어느 나라도 우크라이나에 강한 안보를 제공해줄 명분을 찾지 못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군사 기반 시설을 목표로 삼았다고 말하며 계엄령을 선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군사 기반 시설을 목표로 삼았다고 말하며 계엄령을 선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고재남 유라시아정책연구원장은 “우크라이나의 현실은 강대국 사이에 낀 중간국의 정치·외교가 잘못됐을 때 치러야 할 기회비용을 보여준 극명한 사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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