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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사회 제재 동참한다”면서…대러 ‘독자 제재’엔 선 그은 정부

중앙일보

입력

24일(현지시간) 러시아의 우크라이에 대한 침공을 감행했다. 한국 정부는 우크라이나 사태가 전면전으로 치닫게 될 경우 대러 제재에 동참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CNN 캡쳐]

24일(현지시간) 러시아의 우크라이에 대한 침공을 감행했다. 한국 정부는 우크라이나 사태가 전면전으로 치닫게 될 경우 대러 제재에 동참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CNN 캡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현실화한 가운데 정부가 24일 국제사회의 제재에 동참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독자 제재는 하지 않겠다고 선을 긋는 자기모순적 입장을 보였다.

청와대는 이날 오후 문재인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한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의 보고를 받고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경제 제재를 포함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지지를 보내며 이에 동참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외교부 당국자는 직후 기자들과 만나 “일부 국가의 경우엔 금융 제재를 포함한 (대러) 독자 제재를 고려하고 있는데, 저희는 이걸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독자 제재'엔 굳이 선 긋는 정부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러시아에 대한 비군사적 대응으로서는 제재 부과가 가장 강력한 방안이다. 러시아가 상임이사국으로서 거부권을 행사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각국이 독자 제재에 나서는 게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다. 국제사회의 제재에 동참하겠다면서도 독자 제재는 하지 않는다는 정부 입장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에 대해 외교부 당국자는 “한국은 국제 경제상의 지위도 있고, 적극적으로 제재에 참가하겠다는 메시지를 내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동참하게 될 제재 조치에 대해선 관련 부처에서 검토를 하고 있다. 또 이같은 제재 조치로 인해 경제와 우리 기업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와 피해를 최소화할 방법도 같이 모색하고 필요한 지원을 해 나간다는 입장”이라면서다.

크림반도 때처럼 '암묵적 제재' 가능성 

24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한 거리에 포탄이 떨어져 각종 기물이 와해됐다. [APF=연합뉴스]

24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한 거리에 포탄이 떨어져 각종 기물이 와해됐다. [APF=연합뉴스]

이를 두고 일각에선 과거 2014년 크림반도 강제 병합 당시처럼 ‘암묵적 제재 동참’을 계획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공식적으로 독자 제재라는 형식은 택하지 않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 등의 제재 조치를 자체적으로 이행하는 식이다.

크림반도 사태 당시에도 정부는 별도의 독자 제재를 발표하진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러시아의 에너지 분야에 대한 투자를 전면 중단하는 방법으로 미국과 보조를 맞췄고, 이는 사실상 독자 제재를 시행하는 것과 유사한 효과를 냈다.  

실제 미국이 협력을 요청한 제재는 크게 금융 제재와 수출 통제인데, 수출 통제는 꼭 독자 제재의 형식이 아니어도 가능하다. 현행 대외무역법은 무역 상대국에 전쟁이 발생하거나 국제법규에서 정한 국제평화와 안전유지 등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필요할 경우에는 물품 수·출입을 제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번에도 정부가 비슷한 구상이라면, 이는 결국 한·미 동맹과 한·러 관계를 모두 고려한 ‘균형 외교’를 중심에 놓은 판단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2014년 크림반도 사태와 달리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는 직접적인 군사력을 동원한 일방적 현상 변경 시도이며, 사실상의 ‘전쟁’에 해당한다. 청와대 국가안보회의(NSC) 상임위원회도 이날 오후 회의 뒤 “러시아가 유엔헌장을 비롯한 국제법을 위반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독자 제재에는 애써 거리를 두는 정부의 태도를 두고 미국과 러시아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다 자칫 정부가 강조해 온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일원’과는 거리가 먼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또 아무리 내용 측면에서는 미국이 주도하는 제재를 충실히 이행하려는 의도라고 해도, 독자 제재 발표라는 형식을 택해 스스로에 구속력을 부여하는 것과는 대미 메시지 차원에서 무게감이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절충안은 없다" 美 거센 압박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유엔 주재 미국 대사는 23일(현지시간) 유엔총회 연설을 통해 대러 제재에 동참하지 않는 국가들을 공개 압박했다. [연합뉴스]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유엔 주재 미국 대사는 23일(현지시간) 유엔총회 연설을 통해 대러 제재에 동참하지 않는 국가들을 공개 압박했다. [연합뉴스]

실제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유엔 주재 미국 대사는 23일(현지시간) 유엔총회 연설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대응과 관련해 “절충안(middle ground)은 없다”고 강조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측 모두에 긴장을 낮추라고 요구하는 것은 러시아를 봐주는 것일 뿐”이라면서다.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영토 보전을 지지하면서도 대러 독자 제재까지 하지는 않겠다는 한국 입장에선 뼈아픈 지적으로 들릴 수 있는 대목이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가 미사일 공격을 받는데도 정부가 여전히 현 상황을 ‘전면전’으로 규정하지 않는 데 대해서도 비판이 제기된다. 외교부는 러시아의 침공 직전인 이날 오전 입장자료를 통해 제재 동참의 뜻을 밝히면서도 전제 조건으로 러시아의 ‘전면전’ 감행을 언급했다. 하지만 정작 러시아가 전면전에 착수했음에도 정부는 상황 규정 자체를 피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전면전이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 꼭 정의를 내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며 “전면전 상황이 되면 국제사회와 함께 제재 조치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힌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제재 동참의 조건으로 전면전을 언급하면서도 왜 현 상황이 전면전인지 판단을 내리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특별군사작전 결정 발표에 이은 일련의 상황은 ‘무력 침공’이 발생한 상황으로 보고 있다”고만 말했다.

앞서 정부는 전날까지만 해도 신북방정책 등을 이유로 “(대러 제재에 동참하기는)현실적으로 어려울 것 같다”(22일 파리 현지 외교부 당국자)고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이날 오전에야 급히 입장을 바꿨다. 이를 두고 불신을 자초할 수 있는 빌미를 스스로 제공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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