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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역지사지(歷知思志)

관상과 운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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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유성운 기자 중앙일보 기자
유성운 문화팀 기자

유성운 문화팀 기자

“저녁이 되면 으레 남녀가 무리를 지어 노래를 부르며 즐기고, 귀신·사직·영성에 제사 지내기를 좋아한다… (개경) 태화문 안에 있는 복원관에는 삼청상(옥황상제·노자·장자)이 그려져 있는데, 노자의 수염과 머리털이 다 감색이어서….” (『고려도경』)

송나라 사신으로 온 서긍에 따르면 고려 수도 개경에는 크고 작은 불교와 도교의 사원이 가득했다고 한다. 고구려 시조 주몽의 어머니인 동신성모(東神聖母)의 목제 신상을 모신 사당도 있었고, 국왕도 신상으로 만들어져 숭배 대상이 됐다. 그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명한 산신(山神)에게도 공(公)·후(侯)·백(伯) 같은 작호를 내리고 국가에서 제사를 지냈다.

역지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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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성리학이 보급된 고려 말부터 유생들이 성상 파괴에 나서는 등 분위기가 바뀌었다. 특히 조선 세종은 인격화한 신들의 가족을 “요사한 귀신”이라면서 1430년(세종 1년) ‘각도산천단묘순심별감’이라는 위원회를 설치해 관련 개혁안을 제출하게 했다. 이때 민간 신앙은 철퇴를 맞았다. 이성계 가문이 출발한 영흥에도 ‘성황계국백지신’이라고 불린 성황신이 있었는데 개혁안에 따라 신상이 철거되고 유교식 제사로 대체했다.

그런데도 복을 바라고 재앙을 회피하려는 기복양재(祈福禳災) 문화는 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언론이나 포털은 오늘의 운세를 서비스하고, 유력 정치인의 관상을 소개하기도 한다. 대선을 앞두고 유력 후보들이 무속 논란에 휘말리고, 이에 대해서 여론이 반응하는 것도 한국 사회의 이런 면모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