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배고 뭐든 파는 벼룩 시장"|<황학동「만물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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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황학동 만물상거리의 상품은 내일이 없다.
여러 손을 거친 중고품이고 보니 똑같은 모델이 있을 리 없고 그래서 오늘 안 사면 영원히 살 수 없는 물건들뿐이다.
청계천 8가 삼일고가도로 밑 3·1아파트를 따라 1백여 노점상과 70여 개 점포가 2백여m 보도를 마주하고 늘어서 있다.
『사람 빼곤 뭐든지 다 있지』
과연 살 사람이 있을까 싶은 뚜껑 없는 만년필부터 제법 포장까지 그럴듯한 시계에 이르기까지 온갖 잡동사니가 놓인 규격화된 노점 좌판.
그런가 하면 아파트 1, 2층에 있는 점포에는 묘지망부석10t짜리 프레스 기·중고 TV등 주로 부피 큰 물건들이 임자를 기다린다.『값이 따로 있나.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리는 게지』놋쇠 조각품 등을 파는 손수레 좌판 김병구씨(48)는 흥정만 잘하면 시중 가의 10분의1 가격으로 물건을 살 수 있는 곳이라고 귀뜀 한다.
만물상이다 보니 같은 업종이 없는 것도 이 거리만의 특징.
시류에 따라 1년여 전부터 모습을 보인 복제 비디오 테이프가 요즘은 단연 인기여서 비디오테이프 노점상이 13명으로 단일 업종으로서는 가장 숫자가 많다.
향토 장학금을 받는 하숙생, 영세민, 부유층 등 다양한 고객 층은 대체로 세 부류로 나뉜다.『뭐 재미있는 물건 없을까.』
『중고품이라도 그럴 듯만 하다면….』
『진귀한 물건이 혹시 실수로 잡동사니 속에….』
최근엔 외국손님들도 부쩍 눈에 띈다.
『신혼살림 일체를 구입하는데 20만원이면 덮어쓰고 남아요.』
이곳 상거래는 절대 반품은 사양하지만 품질만은 신용으로 보장한다는 것.
일제 골프채가 4만원, 최신 비디오카메라가 50만원 대이고 4만원 짜리 롤렉스 손목시계에는 보증서까지 딸려 있다.
그러나 이곳 거리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비싼 물건도 있다.
마미야·하셀브라드·롤라이 플렉스 등 사진기는 허름해 보이지만 1백만∼2백 만원선.
이곳에서 날리는 각종 잡동사니는 주로 나카마라고 불리는 중간 상이 공급한다는 것이 상인들의 설명.『인접한 중앙시장을 전국최대 강물집하장이라고 하니까 이곳도 의심을 받아요. 어쨌든 이곳에서 물건출처를 묻고 다니면 요샛말로 프락치로 오해 살 꺼요.』시장에서 만난 50대 초반 고물 수집상의 충고다.
만물상 거리가 현재 위치에 형성된 것은 불과 2년여 전.
『원래 일제시대 때는 과일·채소시장이었지. 6·25동란 이후 중고품·고물 등 이 몰려 고물시장이 됐고 88올림픽이후에 만물상거리가 된 거야』
26년째 터줏대감인 고 가구 취급 M가게 박경태씨(56)가 털어놓는 이곳의 역사.
올림픽을 전후해 노점상과 시장을 일제 정화하면서 시내 곳곳에서 일자리를 잃은 노점상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처음엔 기존 가 까 주인들과 티격태격도 많았지만 지금은 공생관계.
『강사 시작한지 6년여 동안 손수레 빼앗긴 것만도 열서 너 차례는 족히 됩니다.』
반품된 구두를 헐값에 사들여 팔고 있는 노점상 자치회장 소순관씨(38)는 올 4월 자치회를 조직, 좌판도 일정한 크기로 만들고 야바위·호객행위도 금지해 질서를 유지, 구청 측과 마찰 없이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권리금도 형성돼 최저 5백 만원선.
만물상거리는 사연이 많은 만큼 이름도 많다.
벼룩시장·개미시장·고물시장·도깨비시장 등….
『아따 아저씨 만2천 원이 뭐야. 꼬리는 떼요.』
『아줌마 우린 뭐 자선사업 하나요. 흔적은 남겨야지. 천 원 깎아 드릴 게.』
이름만큼이나 천의 얼굴을 가진 만물상거리는 손님들에게 덤으로 인정·인간미를 팔고 있다. <박종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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