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정보·기만전으로 이미 개전
위협과 소요 유발로 붕괴 유도
우크라이나 지역주의 약점 노려
요충지 장악해 지리적 분열 시도
푸틴 정치적 의도 충족이 관건
미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임박한 것으로 보고 외교적·군사적 대응에 나서고 있다. 만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들어간다면 어떤 방식의 전쟁을 벌일까. 독일의 도이체벨레, 프랑스의 프랑스24 등 국제방송과 영국의 BBC방송, 독일 신문 빌트 등을 종합하고 익명을 요구한 서방 군사‧정보 전문가 취재 등을 바탕으로 러시아의 속내를 짚어봤다.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미국과 서방국가들은 러시아를 상대로 지도자 방문과 통화 등으로 치열한 외교전을 벌여왔다. 여기에 더해 상대의 의도와 움직임을 읽는 정보전, 가짜 정보‧뉴스로 상대의 오판을 유도하는 미스인포메이션전‧기만전, 여론을 유리하게 움직이는 선전전‧심리전 등 다양한 물밑 작전도 펼쳐왔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굴복시키려고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전략적으로는 국제질서를 개편해 러시아가 세계의 운명 결정을 좌우하는 강대국 지위로의 복귀를 들 수 있다. 경제력으로 몸집을 불려온 중국뿐 아니라 러시아도 존중해 달라는 요구도 함께 담겼다.
전술적 목표로는 우크라이나의 ‘마비’를 들 수 있다. 러시아를 경계하면서 나토와 유럽연합(EU)에 가입해 서구의 일원이 되겠다는 우크라이나의 의도를 좌절시키면서 과거 소련의 세력권이던 동유럽‧중앙아시아에 살계경후(殺鷄儆猴‧닭을 잡아 원숭이를 길들인다는 고사)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세력을 러시아 국경 쪽으로 뻗어온 나토(북대서양 조약기구)의 기세를 꺾고 미국과 서유럽에 타격을 주는 의도도 읽을 수 있다.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인 45년 얄타‧포츠담 회담에서 전후 세계질서 결정을 주도한 것처럼, 러시아가 세계 운명의 의사결정자로서 강대국 위치를 회복하겠다는 것이다. 전쟁 전인 39년 나치독일과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고 폴란드 동부와 발트 3국, 루마니아 일부를 차지하는 등 동유럽에서 세력을 확장했던 기억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러시아는 언제 침공에 나설 것인가. 지금까지 나온 정보를 보면 개전 시기야말로 가장 중요한 기만전의 대상이다. 2월 초만 해도 러시아‧우크라이나에서 눈과 얼음이 녹으면서 이동이 어려운 라스푸티차(슬라코티‧진창길)가 나타나는 3월 말 이전으로 전망됐다. 그러다 베이징 겨울올림픽과 러시아‧벨라루스의 연합훈련이 끝나는 20일 전후로 예상 시기가 앞당겨졌다. 그러다 미국은 지난주부터 동맹국에 16일이 유력한 개전일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는 이야기를 흘리고 있다.
미국은 러시아가 개전 명분을 조작하기 위해 연출 비디오를 비롯한 기만 정보를 준비하다가 미국 언론들이 이를 보도하면서 당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39년 나치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할 당시, 38년 중일전쟁 개전 시 일제가 베이징 인근 루거우차오(蘆溝橋 사건에서 자작극을 벌여 개전 명분으로 삼았던 거짓 전술을 연상시킨다.
미국이 입수했다는 정보가 러시아가 기만을 위해 의도적으로 흘린 역정보인지, 미국의 정보공개에 러시아가 놀라서 개전 시기를 연기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개전일을 두고 기싸움이 벌이지는 것만 분명하다. 러시아는 침공 의도가 없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는데 이 역시 기만전인지,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려는 미끼인지는 판단하기 쉽지 않다.
수많은 정보가 흘러나오고 있지만 어디까지 러시아 디스인포메이션이고 어디까지 미국 디스인포메이션인지 모호한 상황이다. 다만 러시아에서 국제방송인 RT를 비롯한 국영 매체가 이상하리만큼 조용하다는 점이 특이 동향으로 꼽힌다. 전쟁을 앞두고 개전의 당위성‧임박설 등을 선전하고 국민적 의지를 다지는 적극적인 미디어전에 나서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러시아는 위성국가로 만들거나. 친러 정권을 세우려고 우크라이나 점령을 시도할 것인가. 그러기에는 러시아가 전력이 충분하지도 않고, 점령으로 원하는 것을 모두 얻기도 쉽지 않으며, 특히 뒷감당하기도 마땅치 않다. 전쟁을 벌이고 희생자가 다량 발생할 경우 우크라이나 국민이 완전히 반러로 돌아설 것이 분명하며 이런 우크라이나인을 통제하기란 쉽지 않다. 장기 게릴라전을 벌일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제2의 아프가니스탄이 될 수 있다.
이에 따라 완전 점령보다 지속적인 위협이나 요충지 소요 유발로 국가 마비‧분열을 노릴 수 있다. 러시아는 이미 2008년 조지아를 침공해 압하지아‧남오세티아의 2개의 지방 정권을 수립한 전력이 있다. 러시아와 일부 친러국가를 제외하고는 국제적인 승인을 받지 못한 미승인국가지만 이것만으로도 조지아를 골병들게 하고 나토 가입을 엄두도 못 내게 만들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둘로 나누는 반분 작전을 벌일 수도 있다. 현재 벨라루스에서 훈련 중인 러시아군이 남진해 수도 키예프를 점령하는 시나리오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가 허를 찔러 키예프 대신 우크라이나를 동서로 가르는 드네프르(우크라이나어론 드니프로) 강의 동부를 우선 점령할 수 가능성도 있다. 러시아에서 발원해 벨라루스를 지나 우크라이나를 흐른 뒤 흑해로 들어가는 드네프르 강은 우크라이나에선 유난히 강폭이 넓다. 우크라이나를 남북으로 1000㎞쯤 흐르는데 중부 등에선 강폭이 20㎞를 넘는다.
문제는 이 강을 가로지르는 대형 교량이 고속도로 M01과 M03가 지나가는 수도 키예프(인구 300만), M04가 지나가는 드네프르페트로프스크(98만), M14와 M17이 지나가는 헤르손(28만), 그리고 강을 가로지른 댐 위로 M22가 지나가는 클레멘추크(21만) 등 네 군데에만 있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러시아 공수군이 이 강을 가로지르는 교량들을 접수할 경우 국토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강 동쪽 지역에 배치된 우크라이나군 주력이 보급을 받지 못하고 고립될 수 있다.
게다가 강 동쪽은 인구 40%가 러시아어가 모국어인 인구 140만의 제2도시 하리키우 등이 있는 등 러시아계가 상당수 거주한다. 하리키우는 교통의 중심지다. 서로는 수도 키예프, 동남으로는 러시아계 반군이 장악한 도네츠크‧루안스크와 이어지는 M03 고속도로와 러시아가 병합한 크림반도와 이어지는 M18 고속도로가 각각 지난다. 러시아가 바그네르 그룹 같은 민간군사기업(PMC) 소속 비밀요원이나 무장대원을 이 지역에 주민인 양 진입시켜 독립이나 자치를 선언할 가능성도 있다.
우크라이나는 지역적으로 서부의 친유럽, 중부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동부와 남부의 친러시아 등으로 정치 성향이 나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약점인 이러한 지역주의 최대한 활용해 국가의 분열‧마비‧해체를 시도할 수도 있다.
러시아가 2014년 병합한 크림반도에서 공수부대 등을 동원해 인근 우크라이나 남서부 진입을 시도할 수도 있다. 드네프르 강 하구의 항구도시인 헤르손과 더 서쪽에 있는 최대 항구 오데사를 점령하면 우크라이나의 물류를 마비시킬 수 있다. 더 서쪽에 있는 러시아계가 거주하는 미승인국가 트란스니스트리아와 연결을 시도할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사이에 사이의 드니에스트르 강 동안에 자리 잡은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러시아계 와인 업자들이 거주하는 미니국가로 러시아군이 주둔한다. 이런 작전을 펼칠 경우 가뜩이나 경제가 허약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동서로 포위되고 취약한 내륙국가로 전락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 러시아는 외교적 해법의 가능성을 시사하며 ‘목마른’ 서방을 압박하고 있다. 러시아 측이 공개해 유로뉴스 등이 14일 방영한 동영상에 따르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 외무부 장관 등이 모인 가운데 열린 우크라이나 사태 관련 회의에서 라브로프는 서방을 비난하면서도 “협상 가능성이 아직 남아있다”고 푸틴의 면전에서 보고했으며, 푸틴은 “좋다”고 답했다. 러시아가 출구를 찾는 것인지, 개전의 명분을 쌓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결국 푸틴의 정치적 의지를 실현할 수 있느냐에 개전 여부가 달린 셈이다. 러시아도 외교적 압박의 도구로서 전쟁을 활용할 수 있겠지만 전쟁으로 원하는 것을 모두 얻기도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인적 희생과 물적 피해, 정치적‧도덕적 타격, 그리고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말의 성찬과 경제제재 위협만으론 러시아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생명은 흥정의 대상이 아니다. 현실적으로도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댄 폴란드‧슬로바키아‧헝가리‧루마니아는 물론 러시아와 접경한 에스토니아‧라트비아 리투아니아 같은 발트 3국에서도 불안이 고조되고 있다.
푸틴으로서도 적절한 명분만 얻으면 한발 물러날 수도 있다. 정치적으론 이미 얻은 게 적지 않기 때문이다. 베이징 겨울올림픽을 개최한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은 대회 기간 중 G7(주요 7개국) 지도자와 만나거나 통화하지 못했다.
하지만 푸틴은 미국·프랑스·독일의 지도자와 줄이어 통화와 면담을 했다. 2월의 모스크바는 글로벌 외교의 장이 됐다. 모스크바에서 회의는 춤을 췄다. 러시아로선 1991년 12월 소련이 무너진 뒤 외교에서 최전성기를 맞았다. 지속 가능할지는 알 수 없지만, 정치적으로는 분명히 푸틴이 승리를 거두고 있다.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