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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으로 본 세상](23)'슬기로운 은퇴생활' 위한 조건 두 가지

중앙일보

입력

차이나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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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얘기다. 올해 나이 만 59. 환갑이 멀지 않다. 내년 '은퇴'라는 게 예정되어 있다. 더 기다릴 것도 없이 오늘 바로 퇴사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다. 대학 졸업 후 취업했으니, 33년 직장 생활이 거의 종점에 다다르고 있다.

돌아보면 힘껏 살았다. 철부지 기자 생활, 베이징/상하이 특파원, 그리고 사내 연구소 소장, 회사 대표…. 기사도 많이 썼고, 특종도 해봤고, 기자의 최고 명예라는 '한국기자상'도 받았다. 기자로서는 경험할 수 없는 회사 경영도 해봤다. 그래, 이 정도면 잘했어…. 아쉬움 없는 직장 생활이었다.

그런데 100세 시대란다. 회사 그만두고도 40년을 더 살아야 한다. 그간 직장 생활보다 더 많은 시간을 무엇인가 하면서 보내야 한다. 제2의 삶, 흔히 말하는 '세컨드 라이프'를 준비해야 한단다.

100세 시대다. 직장 생활보다 더 많은 시간을 무엇인가 하면서 보내야 한다. 제2의 삶, 흔히 말하는 '세컨드 라이프'를 준비해야 한단다(사진은 고흐 작 '낮잠').

100세 시대다. 직장 생활보다 더 많은 시간을 무엇인가 하면서 보내야 한다. 제2의 삶, 흔히 말하는 '세컨드 라이프'를 준비해야 한단다(사진은 고흐 작 '낮잠').

인생 2막…. 나는 또 무엇을 해야 하는 건가. 월급 생활에 젖었던 나다. 머리가 복잡하다.

재산이라고는 어떻게 될지도 모를 국민연금, 그리고 달랑 집 한 채가 전부다. 다 내려놓고 전원생활 해보겠다고 양평 용문산 아래로 왔지만, 은퇴 후 생활을 생각하면 여전히 심란하기만 하다.

필자만의 얘기는 아니다.

비슷한 나이의 직장인이라면 많은 이들이 공감할 내용이다. 전력을 바쳐 회사 일에 매달렸고, 가정을 이뤄 아이들 키워냈고, 어느 정도 성공한 삶이라는 자부심도 갖고 있다. 그러나 은퇴는 여지없이 찾아온다. 필자 연배의 많은 친구는 '세컨드 라이프'라는 화두에 시달리고 있을 터다.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나….

주역에게 물어보자. '세컨드 라이프 어떻게 준비해야 해요?'

답은 심플했다. 2가지만 준비하라고 했다.

'돈, 그리고 아내'

3000년 전 주역이 그런 말을 했다고? 정말?

그렇다. 주역 56번째 괘 '화산려(火山旅)'를 펴면 나온다. 오늘 그 얘기해보자.

불을 상징하는 리(離, ☲)가 위에, 산을 의미하는 간(艮,☲)이 아래에 놓여있다(䷷). 산봉우리에 불이 타는 형상이다. 불꽃은 이 봉우리 저 봉우리로 옮겨 타오른다. 그래서 괘 이름이 여행을 뜻하는 '旅(여)'가 됐다.

'화산려(火山旅)'괘는 불을 상징하는 리(離, ?)가 위에, 산을 의미하는 간(艮,?)이 아래에 놓여있다. 산봉우리에 불이 타는 형상이다./ 바이두

'화산려(火山旅)'괘는 불을 상징하는 리(離, ?)가 위에, 산을 의미하는 간(艮,?)이 아래에 놓여있다. 산봉우리에 불이 타는 형상이다./ 바이두

여행은 즐거운 일이다. 비행기 타고 대륙을 넘고, 멋진 호텔에서 안락함을 즐긴다. 입으로 먹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말이 현대 여행을 대변한다.

그러나 3000년 전 주역의 시대 여행은 고행(苦行)이었다. 산 넘고, 강 건너야 하는 길을 마냥 걸어야 했다. 럭셔리 호텔이 어디 있는가. 드문드문 있는 객잔(客棧)의 딱딱한 방에서 여독을 풀어야 한다. 산적이라도 만나면 다 털리기도 했다. 여행을 떠난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

'여(旅)'괘가 풍성함, 풍년 등을 주제로 한 '뇌화풍(雷火豊, 55괘)' 바로 뒤에 오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豊大者也, 窮大者必失其居, 故受之以旅'

'풍(豊)은 넉넉한 것이다. 넉넉함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거주할 곳을 잃게 된다. 그래서 여(旅)로 받는다.'

주역의 순서를 논한 '서괘전(序卦傳)'의 설명이다. 오랫동안 누렸던 풍성함이 극에 달하면 궁색하게 되고, 나중에는 떠돌이 신세가 될 수 있기에 '여(旅)'괘를 '풍(豊)'괘 다음에 배치했다는 얘기다.

필자의 처지가 그렇다. 33년 직장 생활은 풍성했다. 무엇을 하던 월급은 꼬박꼬박 통장에 찍혔다. 그 돈으로 집 장만하고, 아이들 키우고, 문화생활도 즐길 수 있었다. 풍부한 삶이다. 이제 그 풍성함을 마감해야 할 때가 다가왔다. 궁색해질 수밖에 없다. 수익이 줄어드니 당연히 지출도 줄여야 한다. '기자님', '대표님'으로 상징되던 사회 위상도 많이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또 던지는 질문. 남은 40년, 새로운 인생 여정(旅程)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旅卽次, 懷其資, 得童僕, 貞'

'여행하다 숙소에 든다. 노자도 넉넉하고, 심부름꾼도 얻었으니 근심이 없다.'

두 번째 효(爻) 효사다. 6개 효 중에서 유일하게 안락한 여행을 위한 조건을 얘기하고 있다. 노자와 심부름꾼이 있으니 숙소에서 편하게 쉴 수 있다. 비굴하지 않고 떳떳하게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노자(資)'와 '심부름꾼(童僕)', 필자는 이를 돈과 아내(남편)로 해석한다. 통장에 돈이 수북하게 쌓여있다면 은퇴가 뭐 걱정이겠는가. 오히려 축복이다. 남을 돌볼 여유도 생긴다. 얼굴 주름 수가 적어진다.

돈만 있다고 행복이랄 수 없다. 외로움을 이길 수 있는 말벗, 서로 손발이 되어줄 수 있는 동반자가 필요하다. 밤이나 낮이나 옆에 있어 서로를 살펴줄 사람, 그건 아내(남편)일 수밖에 없다.

돈과 배우자, 3000년 전 주역이 꼽은 '세컨드 라이프'의 핵심 요소다.

노자(資)'와 '심부름꾼(童僕)', 이를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면 돈과 아내(남편)다. /바이두

노자(資)'와 '심부름꾼(童僕)', 이를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면 돈과 아내(남편)다. /바이두

'화산려' 괘는 '슬기로운 은퇴 생활'을 위한 몇 가지 충고를 던진다.

우선 사소한 일에 매달리지 말라고 강조한다.

'旅瑣瑣, 斯其所取災'

'여행하면서 자질구레한 일에 매달린다면, 그 때문에 재앙을 당한다.'

첫 번째 효(가장 아래 효) 효사다.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말라는 얘기다.

살만큼 살았으니,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야 한다. 작은 일에 집착하다 보면 자칫 추해질 수 있다. 너그러워야 한다. 용서(容恕)의 폭을 넓혀야 한다. 지갑도 마음도 풀어야 한다. 소갈머리가 좁으면 설사 가족이라도 좋아할 리 없다.

주역은 또 지나치게 왕성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旅焚其次, 喪其童僕

'묵던 여관에 불이 나 타버리고, 함께 했던 심부름꾼도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세 번째 효사다. 이 효는 양(─)인데 중도를 잃었다. 양기가 너무 왕성한 데다 경솔하고 조급하다. 그러니 가진 것 다 잃는다. 여관이 불타고, 심부름꾼이 떠났다는 건 이를 표현한 말이다.

나이를 생각해야 한다. 젊었을 때 생각으로 뭔가에 홀려 조급하게 일을 꾸미면 자칫 재앙을 당하기에 십상이다. 작은 이익에 눈이 멀어 퇴직금 쏟아부었다 쪽박 차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봤다. 세상 만만하게 보고 정계를 기웃거리다 쌓았던 명성마저도 다 잃는 경우도 있다. 돈도 잃고, 믿었던 가족마저 멀어진다. 최악의 상황이다.

'화산려' 괘는 또 정기적으로 할 일을 찾으라고 권한다.

旅于處, 得其資斧, 我心不快

'임시 처소에 들었다. 노자와 도끼가 있긴 하지만 내 마음은 유쾌하지 않다.'

네 번째효사다. '處(처)'는 정해진 숙소가 아닌 대충 마련한 잠자리다. 편할 리 없다. 들판에 대충 자리 깔고 누었으니 돈과 도끼가 있으면 뭐하겠는가. 처량한 생각이 든다.

공자(孔子)는 '제 위치를 찾지 못해 불안한 것(未得位, 心未快)'이라고 설명한다. 제 위치를 찾지 못했다는 건 소속감이 없다는 걸 뜻한다.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찾아야 마음이 안정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뭔가 일을 해야 한다. 사회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열어놔야 한다. 사회봉사도 좋은 방법이다. 일이 있어야 자존감(自尊感)을 지킬 수 있다.

3000년 전 주역의 시대 여행은 고행(苦行)이었다. 산 넘고, 강 건너야 하는 길을 마냥 걸어야 했다. 드문드문 있는 객잔(客棧)의 딱딱한 방에서 여독을 풀어야 한다. 산적이라도 만나면 다 털리기도 했다. /guoyi360.com

3000년 전 주역의 시대 여행은 고행(苦行)이었다. 산 넘고, 강 건너야 하는 길을 마냥 걸어야 했다. 드문드문 있는 객잔(客棧)의 딱딱한 방에서 여독을 풀어야 한다. 산적이라도 만나면 다 털리기도 했다. /guoyi360.com

종즉유시(終則有始)!

무엇인가를 끝내면 또 다른 시작이 있게 마련이다. 은퇴는 곧 새로운 인생 여정의 시작이다. 어찌 곤궁함 만 있겠는가. 여행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곤 한다. '은퇴의 여행'도 다르지 않다. 처량한듯하면서도 삶의 활기를 찾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그러기에 기대감도 없지 않다. 이제까지 직장생활 하면서 해보지 못했던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은퇴가 기다려지기도 한다. 뭘 할 수 있을까.

'화산려' 괘는 필자에게 '꿩을 잡아보면 어떻겠냐'라고 제시한다.

'射雉, 一矢亡, 終以譽命'

'꿩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 한 개를 잃었지만, 마침내 명예롭게 천명을 받든다.'

다섯 번째효사다. 꿩(雉)은 화려함을 상징한다. 실제로 꿩을 보면 곱고 아름답고, 다채롭다. 꿩을 잡으면 좋고, 아니어도 별 상관없다. 화살 하나 잃는 게 뭐 대순가. 꿩을 잡으러 다니는 행위가 중요할 뿐이다. 삶을 아름답고 다채롭게 꾸미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곱게 늙고, 아름답게 생을 마감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천명을 받드는 길이다.

은퇴 생활을 꿩 무늬만큼이나 다채롭게 꾸미라는 충고다.

활 메고 꿩 사냥에 나서야겠다. 그러기에 아내와 함께할 나의 은퇴 여정은 즐거운 행진이다.

한우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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