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에 있는 주한 중국 대사관. 중앙 포토
베이징 겨울올림픽으로 국내 반중 정서가 높아지는 가운데 중국이 주한 대사관을 중심으로 적극적 반박에 나서고 있다. 중국이 외교적으로 공격당하거나 불리한 상황이 발생할 때 거친 태도로 공세에 나서는 ‘전랑외교’(战狼外交, Wolf Warrior Diplomacy)를 한국에서도 선보이는 모양새다.
한복엔 언론탓, 판정엔 정치인탓
주한 중국 대사관 대변인은 8일과 9일에 걸쳐 두 차례 공식 입장문을 언론에 배포했다. 8일에는 올림픽 개막식 공연에서 불거진 ‘한복 논란’과 관련해 “일부 언론의 억측과 비난”이라고 반박했다.
9일에는 쇼트트랙 종목에서 황대헌‧이준서 선수가 납득하기 어려운 실격 판정을 받은 뒤 국내에서 편파 판정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는 데 대해 “일부 한국 언론과 정치인들이 반중 정서를 부추긴다”고 밝혔다. “책임감 없는 태도를 용납할 수 없고, 엄중한 우려와 엄정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다.
4일 오후 중국 베이징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한복을 입은 한 공연자가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사실 국내에서 한복 논란의 핵심은 그간 중국 내에서 SNS 등을 중심으로 한복, 김치, 태권도 등을 대상으로 꾸준히 이어졌던 민간 차원의 ‘문화 공정’ 시도다. 이런 왜곡이 올림픽이라는 국제 행사를 통해 본격화할 수 있다는 우려였다.
하지만 주한 중국 대사관은 이런 배경과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한복은 조선족의 것이기도 하다”고 반박했다. 마치 한국 여론의 우려가 조선족의 문화를 존중하지 않는 공연한 문제 삼기인 양 몰아가는 것처럼 들릴 여지가 있었다.
“엄중한 우려, 엄정한 입장 표명”
또 쇼트트랙 편파 판정은 한국뿐 아니라 터키도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공식적으로 윤리 조사를 요청하는 등 공정성 시비가 광범위하게 문제되고 있다. 하지만 대사관은 이로 인해 퍼지는 국내 반중 정서를 온전히 언론과 정치인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한국의 일부 언론과 정치인들이 ‘올림픽에 흑막이 있다’고 억측하고, ‘중국 당국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함부로 말한다”고 표현하는 등 판정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 한국에서 음모론이라도 퍼뜨린다는 식의 뉘앙스였다. 이미 쇼트트랙 편파 판정과 반중 정서가 한국 대선에서 무게감 있는 이슈로 떠오른 가운데 대사관이 이처럼 직접 정치권을 비난하는 입장을 내는 것은 정치적 영향을 미칠 우려마저 있다.
한국 쇼트트랙 대표팀 황대헌이 7일 오후 중국 베이징 캐피탈 실내 경기장에서 열린 쇼트트랙 남자 1000m 준결승 1조 경기에서 중국 선수들을 인코스로 추월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중국의 공세적(assertive) 외교 행태에 대해 “(중국이)경제적으로 강해지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일”(지난해 9월 미국외교협회 초청 대담)이라고 발언해 중국의 전랑외교를 두둔하는 것이냐는 논란이 일었는데, 이제는 한국이 전랑외교의 직접적 타깃이 된 셈이다.
전랑외교 선봉엔 항상 대사관
이런 공격적 대응의 주체가 주재 대사관이란 점도 그간 중국이 각국에서 보여온 전랑외교의 전형적 양상이다. 다른 나라에서도 전랑외교의 선봉에는 대사관이 나섰다.
왕시닝 호주 주재 중국 대사관 대사대리는 지난해 11월 호주의 오커스(AUKUS‧미국, 영국, 호주 간 안보동맹) 결성에 대해 언론 인터뷰를 통해 “(호주가 핵잠수함을 취득한다면)못된 놈(naughty guy)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파키스탄 주재 중국 대사관 문화담당 장허칭은 지난해 6월 트위터에 “우리가 적을 대하는 방식”이라며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그림을 올리기도 했다. 적이 누군지를 칭하지는 않았지만, 현직 외교관이 저속한 욕설까지 동원한 것을 두고 전랑외교의 민낯이 드러났다는 비판이 국제적으로 일었다.
지난해 7월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 행사에서 손 흔드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로이터=연합뉴스
한국 외교부는 공식적 대응을 자제하는데, 주재국과의 우호 협력 증진이 주된 임무인 주재 대사관이 언론 입장문을 통해 이런 식으로 ‘비난전’ 양상을 끌어가는 것 자체가 외교적 결례란 지적도 있다. 외교부는 한복 논란에 대해 “중국 측에 고유한 문화에 대한 존중과 문화적 다양성에 기초한 이해 증진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지속적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입장만 밝혔을 뿐이다.
이와 관련, 최영삼 외교부 대변인은 10일 오후 정례브리핑에서 주한 중국 대사관의 이런 태도는 외교 결례이자 내정 간섭으로 볼 여지가 있지 않으냐는 질문에 “주재국 언론 보도와 정치인 발언 등에 대한 외국 공관의 공개적 입장 표명은 주재국의 상황과 정서를 존중해 신중하게 이뤄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만 답했다.
결국은 중국 내 여론 결집용?
외교가에서는 중국 대사관의 이런 태도에 ‘국내용 포석’이 깔렸다는 시각이 많다. 사실 베이징 올림픽을 통해 중국이 달성하려는 목적은 중화민족의 부흥을 대내외적으로 부각하고,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주한 중국 대사관이 한국 내에서 높아지는 반중 정서를 거칠게 공격하는 게 이런 목적 달성에 효과적일 수 있다는 뜻이다. 사실 중국이 최근 몇 년 사이 벌여온 전랑외교는 급격히 커진 중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에 기반하며,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밝힌 “외세가 중국을 괴롭히면 머리가 깨지고 피를 흘릴 것(外勢欺負 頭破血流, 외세기부 두파혈류)”(지난해 7월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일)이라는 중화 패권 정신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주한 중국 대사관이 쇼트트랙 편파판정 논란에 대해 ″엄정한 입장″을 밝힌 글이 웨이보에 게재된지 하루도 되지 않아 조회수 4억 6000만회를 기록했다. 웨이보 캡처
실제 중국 대사관이 9일 편파 판정 논란과 관련해 “엄중한 우려”를 표한 입장문은 웨이보에서 게재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약 조회 수 약 4억 6000만(10일 오전 10시 현재)을 기록했다. 한국 내 반중 정서가 중국 내 반한 정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