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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에 급급한 경찰/이철호 사회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이 선포된 후 최일선 보병격인 경찰은 눈코뜰새 없이 바빠졌다.
잇단 검문검색ㆍ잠복근무 등 동원 가능한 모든 인원과 장비를 투입해 실제 전쟁을 방불케할 정도이며 과로로 인한 순직자까지 발생했다.
경찰 간부들은 『대통령까지 팔을 걷어 붙인 마당인데 이번 기회에 아예 폭력의 뿌리를 뽑겠다』며 결연한 표정이다.
법원과 검찰이 흉악범들에게 잇따라 법정최고형을 내렸고 경찰도 주워담기 식으로 각종 범법자를 무더기 연행했다.
『음주운전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처벌하겠다』는 대통령의 의지는 강남일대 유흥가를 썰렁하게 만들었고 각종 조직폭력배들도 공권력의 소나기를 피해 지하로 잠적했거나 아예 외국으로 달아날 만큼 몸을 사리고 있다.
경찰서에 연행된 피의자들도 분위기 탓인지 대부분 풀 죽은 모습으로 고분고분하게 조사를 받고 있다.
경찰관 대부분은 『오랜만에 일할 맛이 난다』며 이번 전쟁으로 공권력이 확실히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같은 전쟁선포 작전이 시간이 흐를수록 경찰서 간의 「실적경쟁」으로 흐르는 감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각 경찰서의 참모회의도 『다른 서는 어제 몇건을 했는데 우리도 그만큼은 해야 되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
심지어 몇몇 간부들은 당연히 즉심에 회부될 사건까지도 『왜 형사입건하는 방향으로 노력조차 해보지 않고 풀어주었느냐』며 부하직원을 몰아세울 정도다. 특히 증거확보를 위해 범인이 소지하지 않은 흉기를 시중에서 구해 증거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경찰서 보호대기실은 피의자들로 넘쳐나지만 막상 사소한 술좌석에서의 시비나 실수가 대부분이다.
「사회의 안정을 해친다」는 대 범죄전쟁의 의미에 걸맞는 흉악범과 대형 경제사범은 드문 편이다.
좋은 뜻에서 출발한 대 범죄 선전포고가 실적위주로 흐르거나 큰 고기는 빠지고 애꿎은 피라미만 잡아들이는 식이 되어서는 정말 안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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