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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연탄 도둑에 술 먹이고…정 넘쳤던 광산촌 판잣집 이웃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214·끝)

몇 년째 코로나 팬더믹으로 일상이 힘들고 선거까지 겹쳐 어수선하다. 우리 동네 외딴 빈집 마당에 낯선 차가 들어가더니 젊은 남녀가 투덕거리며 짐을 내렸다. 빈집의 친척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궁금한 어른들이 며칠 후 버려진 짐을 들춰 보니 살림살이 같단다. 방을 빼고 난 허드레 짐을 사전 답사한 빈집에 버렸다는 것이다. 경찰도 조사차 다녀갔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내가 시나리오로 써보고 싶은 잊을 수 없는 곳이 있다. 어쩌다 쫄딱 망해 혼수로 해간 많은 살림을 다 버리고 남편과 도망가 살던 광산촌이다. 그곳에는 부모를 모시고 사는 남편 또래의 젊은 부부가 있었다. 부모가 농사짓던 밭에 집을 지어 세를 주었는데, 열두 집을 두 줄로 나뉘어 개집처럼 다닥다닥 붙여 마주 보게 지은 판잣집이었다. 작은 방 한 칸과 부엌. 위험하지만 광부라는 직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살만했다. 일하다가 죽으면 그나마 남은 가족만큼은 덜 힘들게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모여든 이들이다(한집은 부모를 모시고 다섯 식구가 살았고 나머진 비슷한 청춘의 혈기들. 나를 포함 임신한 부인이 5명이나 있었다).

광산촌에 살았던 적이 있다. 양철지붕의 빗소리부터 사계절의 변화까지 그 경험은 무엇에 비유할 수 없을만큼 생경하였다. [사진 Wikimedia Commons]

광산촌에 살았던 적이 있다. 양철지붕의 빗소리부터 사계절의 변화까지 그 경험은 무엇에 비유할 수 없을만큼 생경하였다. [사진 Wikimedia Commons]

양철지붕의 빗소리, 여름과 겨울의 춥고 뜨거움은 무엇에 비유할 수 없이 생경했다. 아침이면 두 개뿐인 변소(화장실과는 다른) 앞에 줄을 서야 했고,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으러 또 줄을 서야 했다. 밤새 고인 물은 열두 집이 나누기엔 턱없이 모자라 한집에 한 동이씩만 할당이 되었다. 그걸로 밥하고 세수하고 설거지하고 빨래도 했다. 아파 죽을 것 같아도 물을 받아 놓은 후 기어들어가 죽어야 할 판이었다. 세입자는 주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화장실 순번도 바꿔주고 줄을 서지 않아도 물을 받아주었다.

우리는 한 달에 5000원의 월세를 냈다. 사정이 생겨 못 내면 당장 방을 빼야 할 만큼 주인은 눈을 부라렸다. 주인 목소리가 크게 들리면 이웃들이 하나둘 나와서 집세를 못 내 고개 숙인 세입자 등 뒤에 마치 조폭처럼 든든하게 배경이 되어 서 있거나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돌았다. 그러면 주눅이 든 주인은 표정을 바꾸며 집세를 며칠 연기해 주었다. 그들보다 더 가난한 연탄 도둑도 들어왔다. 그럴 때도 그들은 함께 달려가 잡았다. 북 치듯 두드려 패고 나면 술잔이 돌고 돌아갈 땐 도둑의 양손에 연탄이 들려 있었다. 아이 못 낳는 한 여자는 배부른 여자들만 지나가면 째려보았는데 나는 화장실 갈 때도 그녀의 눈치를 보며 다녔다. 그런데 내가 아이를 낳았을 때 그녀는 2주나 산후바라지를 해주고 아이를 돌봐주었다. 남남이지만 서로에게 형제애 같은 정이 흘렀다.

어려운 일엔 굳게 뭉치던 그들은 연탄 한장으로 원수가 되어 주먹이 오갔다. 날마다 그럴만한 뉴스가 생겼다. 뉴스는 술판과 잘 어울렸다. 술은 야간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자의 손에 들려 아침부터 밥상으로 출근했다. 술이 수면제가 되지 못해 엇나가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우는 남자로, 쌍욕을 해대고 밤새도록 노래하는 사람으로 변신시켰다. 한집에서 들리는 그 소리는, 이어진 천장을 넘나들며 모두의 잠을 설치게 했다. 술만 먹으면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는 한 남자는 호박(머리)을 깨버리겠다고 소리치면서 문을 발로 탕탕 치며 밤새 돌았다. 정말로 숨소리도 들키면 머리통 깨지는 건 시간문제 같았다. 퇴근 후 느긋이 밥 반주를 하던 남편은 별일 아닌 듯 말했다.


“그래서 술은 잘 배워야 하는 거야. 나를 봐라. 나는 6살부터 어른 무르팍에서 배워서 얼마나 품위 있나 말이다. 흠흠. 저렇게 응어리 풀어야 기운이 또 난다. 자자고마. ”
품위 있는 술꾼께서도 가끔은 내 집을 못 찾아 들어가 맞아 죽을 뻔 했다.


얼마 전 거기서 같이 살던 분이 신문의 내 글을 보고 연락이 닿아 지난 이야기로 긴 시간을 울고 웃었다. 그리곤 몇몇 분의 안부를 전해 주었다. 자신은 사업가로 잘살고 있고, 호박을 깨겠다며 돌아치던 누구는 진폐증으로 병원에 있으며, 누구는 목사가 되었고, 마지막까지 착하기만 하던 누구누구는 죽었단다. 이전엔 이웃과 함께 오가는 따스한 정으로나마 살아냈다. 현대는 아파서 죽기보다 외로워서 죽는다. 같이 있어도 고독하다. 그러니 내 삶에 뉴스가 없다면 나는 죽어서 살아 있는 것이다.

10년 후 세상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나는 또 그때까지 살아있을까? 나이 들면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게 눕는 거라는 말이 있다. 힘들어 소리 지르고 욕을 하고 종내에 가진 것을 다 버리더라도 꿈과 소망은 절대 버리지 말자. 살아가는 이야기로 독자들과 함께한 지 4년이 지났다. 나를 작가로 만들어 준 중앙일보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글을 ‘[더,오래] 살다보면’의 마지막 회로 쓴다. 행여나 글로 다시 만나는 인연이 되는 독자는 두 팔 벌려 나를 안아주길 기원한다. 나도 또한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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