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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홀로 걸으며 내 안의 나와 대화했던 달마고도길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211)

지난 글에 내년엔 돈을 모아 산티아고 길을 걸을 거라고 자랑했다. 어쩌면 나는 그 길을 영원히 못 가보고 뻥만 치다가 끝날지도 모른다. 여행경비야 만들겠지만, 일용인부의 삶을 사는 내가 40일이나 되는 시간을 낸다는 것은 꿈이다. 무릎이 닳아 일을 못 하게 되었을 때야 만들어질 시간인데 그러면 어차피 걷지도 못하는 시간 아닌가. 그렇지만 해마다 목표를 정해놓고 황당한 이야기 같은 꿈을 꾼다. 곧 이루어질 것처럼 떠들어 대고, 그날이 올 것처럼 걷고 또 걷는다.

금요일이면 신문에서 오만 길을 보여준다. 길은 나에게 위로와 격려를 보내며 속삭인다. ‘이름만 다르지 길은 길이잖니?’

허황한 꿈속에서 헤매는데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열흘의 연말 휴가가 주어졌다. 긴 시간이다. 올망졸망한 귀여운 손자들에게 납치되어 시간을 허비하면 너무 아쉽다. 나는 신문에 소개된 해남 남파랑길 코스를 가위로 오려내어 시간 보따리에 싸 들고 탈출하기로 한다. 휴가가 주어진 첫날 아침, 중무장한 복장에 몸통(카드)만 챙겨 길을 나선다.

긴 여정에 앞서 문지방을 나서는 일이 가장 어렵다. [사진 Wikimedia Commons]

긴 여정에 앞서 문지방을 나서는 일이 가장 어렵다. [사진 Wikimedia Commons]

에베레스트를 열 번도 넘게 오른 산악인도 가장 힘든 일은 문지방을 나서는 일이라 했다. 나 역시 혼자라는 두려움에, 빈약한 체력에, 안 가도 되는 백 가지 이유가 나를 가로막았다. 그래도 무사히 문지방을 넘고 나와 1차 관문은 가볍게 넘었다.

자유로운 시간을 즐기기로 하고 대중교통편을 섭렵한다. 집 나서면 개고생이라지만 힘들어도 해보고 싶다. 치매 예방에도 좋다. 한국은 참 살기 좋은 나라다. 화살표와 신호등을 해석하고 한글만 읽을 줄 알면 60대 중반의 어리버리한 나도 혼자서 구석구석 너무 쉽게 간다. 거기에 앱을 사용한다면 앉아서 구만리다. 일정 메모 날씨와 교통편 현지상황 길 안내까지 다해주는 비서다. 안동에서 버스와 기차를 타고 환승하고 또 환승한다. 가져간 책을 다 읽으면 다음 환승지에 도착, 그렇게 마을버스까지 바꿔 타고 출발지점인 해남에 도착했다.

전 일정을 계획하고 방랑자같이 혼자 다니겠다는 각오로 출발했는데 안동에 살다가 전라도로 귀농한 친구가 연락되어 더 반긴다. 시간이 되는 구간은 동행하기로 했다. 친구가 있으니 든든하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 특별한 작품이 된다. 인생살이도 그렇다. 사진은 해남 남파랑길. [사진 손민호]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 특별한 작품이 된다. 인생살이도 그렇다. 사진은 해남 남파랑길. [사진 손민호]

며칠 동안은 근교의 섬을 찾아 둘레길을 걸었다. 조금씩 거리를 늘렸다. 5일째 되는 날 드디어 이번 여행길의 하이라이트인 남파랑길 90코스를 완주했다. 친구와 그의 후배 그리고 나, 셋이서 걸었다. 동행한 젊은 사람은 이틀 동안 다리에 알이 배여 힘들었다며 어르신(나)은 괜찮은지 걱정한다. 나는 다음날 삼문산 1코스를 또 걸었다. 흠, 어떤 일에도 리허설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섬 투어로 걸었던 것이 연습이 되고 체력이 되었다. 달마고도 길은 은둔자의 길이다. 홀로 길을 걸으며 내 안의 나와 대화하고 안부를 물을 수 있어서 좋다. 그날은 산 정상에 지어진 도솔암까지 올라갔다. 그 길은 너무 가파르고 위험했다. 후둘거리는 걸음에 삐끗하여 헬리콥터에 실려 내려오는 상상을 한다. 올라가다 보니 정상이다. 그런데 근처까지 차로 오를 수 있는 길이 있다. 인생살이랑 비슷하다. 허무한 느낌이 잠시 든다.

젊었을 땐 작은 산을 오를 때도 정상까지 코스를 염두에 두니 지레 두려워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했다, ‘마음 가는 데까지’라는 생각으로 걷다 보면 어느새 그 험한 정상에 올라가 있었다. 책에서 읽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중국의 험난한 꼭대기에 움막 같은 절이 하나 있었단다. 차도 마차도 길이 험해 못 올라오는 곳이었다. 그 험한 길을 70이 넘은 초로의 스님이 들어오는 것이다. “이 험난한 길을 어떻게 오셨습니까?” 노스님이 합장하며 답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왔지요.”

행여나 나에게 기회가 주어져 산티아고 길을 가게 된다면 지금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인 작품일 것이다. 평범한 시간이 특별한 이야기가 되는 소소한 행복. 내 삶이 그런 거 같다. 오늘 신문에도 ‘한국의 산티아고 길’이라며 멋진 길을 소개해 내 눈과 마음을 어지럽힌다. 나는 가위질을 하며 또 오려낸다. 고이 접어 수첩에 넣고 제2, 제3의 산티아고 가는 길을 리허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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