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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미디어 산업을 뒤흔든 지방도시 무명 교수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74호 21면

루터, 브랜드가 되다

루터, 브랜드가 되다

루터, 브랜드가 되다
앤드루 페트그리 지음
김선영 옮김
이른비

무명의 지방 소도시 대학교수가 세계사를 바꾸는 글로벌 대스타가 되기까지.

줄거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주인공은 마르틴 루터. 누구인지 가물가물하다면 이 단어를 떠올리면 된다. 종교개혁.

1517년 가톨릭교회의 면벌부(벌을 사면함을 증명하는 문서) 판매를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내걸며 종교개혁의 문을 연 마르틴 루터의 일생을 담은 전기다. 서구 문명사 흐름을 바꾼 불세출의 혁명가 루터는 서양사학계의 핫 아이템. 그런데 이 책은 초점이 좀 다르다. 커뮤니케이션 역사 전문가인 저자는 루터의 삶을 산업적인 측면에서 조망한다. 16세기 초반 유럽을 휩쓴 ‘신산업’ 인쇄출판업이 그것이다.

독일 소도시 비텐베르크의 신학교수 루터가 교회 외벽에 내건 대자보가 어떻게 유럽 전역을 발칵 뒤집히게 만들었을까. 저자는 이것이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 말한다.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한 지 고작 77년, 인쇄물이라곤 교회 팸플릿 정도로 척박했던 출판업에 일어난 기적.

애초 95개조 반박문은 루터가 학문적 토론을 위해 붙인 대자보였다. 인쇄업자들은 그의 간결한 문체, 단도직입적인 문장, 파격적 주장이 지닌 상업적 가치를 간파했다. 일단 인쇄되기 시작하자 반박문은 새 생명을 얻었다. 무명의 교수 루터는 단숨에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한다.

루터가 자신을 향한 공격에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책 출판으로 맞서기 시작하자 독일 인쇄업자들은 환호했고, 대중은 열광했다. 교회 인쇄물을 찍던 인쇄소들은 기꺼이 돈이 되는 루터의 책을 출판했다. 루터는 탁월한 글솜씨로 엄청난 분량의 저작물을 쏟아냈다. 동시에 어떻게 하면 책을 더 돋보이게 할지 고심했다. 문단 첫 부분을 들여쓰기하고, 단락 사이를 적절히 띄고, 예쁜 활자를 쓰는 것. 이런 디테일까지 신경 썼다.

이러한 세심함은 ‘루터 브랜드’를 탄생시켰다. 우아한 목판화 그림과 가운데 또렷이 박힌 ‘마르틴 루터’ 저자명, 그리고 ‘비텐베르크’에서 발행된 책이라는 표기까지. 강력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책표지는 루터 브랜드의 압축판이었다. 종교개혁가 루터는 탁월한 매체 개발자이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을 바꾸려면 미디어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저널리스트나 전기작가가 아닌 역사학자인 저자의 글쓰기 방식은 새롭다. 과장된 수식어나 추측, 상상은 뒤로 한 채 촘촘한 사실의 나열로 이야기를 채워간다. 방대한 정보량에 일단 놀라고, 이를 엮어낸 솜씨에 또 놀란다. 문장마다 빼곡하게 들어찬 역사적 사실을 쫓아가야 하다 보니 쉬엄쉬엄 읽을 책은 아니다. 대신 읽기 시작하면 500년 전 유럽, 그 격동의 현장을 생생히 목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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