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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안보리 어디 쓰나…"北에 백지수표 줬다" 무적의 비토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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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는 유엔 회원국에 대해 법적 구속력이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다. 특히 결의·의장성명·언론성명 등 안보리 차원의 3가지 조치 중 결의에서 의무로 규정한 경우 회원국의 국가 주권과 배치된다 하더라도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안보리를 유엔의 중추 기관이자 ‘실세’라 부르는 이유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5개 상임이사국과 10개 비상임이사국으로 구성된다. 이 중 P5로 불리는 5개 상임이사국의 경우 안보리 내에서 절대적 거부권을 갖는다. 상임이사국 중 한 국가라도 거부 의사를 밝힐 경우 일체의 결의안이 채택되지 않는다. [신화사=연합뉴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5개 상임이사국과 10개 비상임이사국으로 구성된다. 이 중 P5로 불리는 5개 상임이사국의 경우 안보리 내에서 절대적 거부권을 갖는다. 상임이사국 중 한 국가라도 거부 의사를 밝힐 경우 일체의 결의안이 채택되지 않는다. [신화사=연합뉴스]

북한 경제난 가중의 핵심 원인으로 지목되는 대북 제재 2371·2397호는 안보리 결의가 갖는 막강한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북한은 각각 2017년 8월과 12월에 채택된 두 건의 제재 결의로 석탄·철광석 등 광물 수출이 전면 금지됐고, 정제유 수입은 연간 50만 배럴로 제한됐다.

하지만 최근에는 북핵 등 중대한 안보 위협이나 긴급 지원이 필요한 국제적 위기 상황에서도 안보리가 뜻을 한데 모으지 못하며 안보리의 기능에 대한 회의론이 표출되고 있다.

P5 거부권 남용이 낳은 '안보리 무용론'  

미국 뉴욕에 있는 유엔본부 [AP=연합]

미국 뉴욕에 있는 유엔본부 [AP=연합]

안보리는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 등 5개 상임이사국과 10개의 비상임이사국 등 총 15개 이사국으로 구성된다. 10개 비상임이사국의 임기는 2년인데, 아시아·아프리카·유럽·중남미 등 대륙별로 1~3개의 이사국 자리를 차지한다. 한국은 오는 2024~2025년 임기를 목표로 세 번째 비상임이사국 진출에 도전하고 있다.

안보리 내에서 ‘P5(Permanent Five)’로 불리는 5개 상임이사국의 권한은 막강하다. 특히 제재 결의 등 강제력을 갖는 결정에서 이들 5개국은 절대적인 비토(veto·거부)권을 갖는다. 5개 상임이사국 중 한 국가라도 반대하면 제재 결의를 채택할 수 없다. 5개 상임이사국은 안보리의 칼 끝이 자신을 향하는 상황을 언제든 막아낼 수 있는 방패를 갖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5개 상임이사국이 사안별로 ‘미·영·프 vs 중·러’로 갈려 기 싸움을 벌이는가 하면, 거부권을 활용해 안보리 차원의 공동대응을 무력화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특히 분쟁·내전·쿠데타나 무력시위에 따른 안보 위협 등 국제사회가 촉각을 곤두세우는 국면에서조차 ‘자국 우선주의’에 물든 상임이사국의 거부권 남용으로 안보리가 멈춰서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거부권에 발목 잡혀 '반쪽 성명'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유엔 주재 미국 대사는 지난 12일 북한의 연이은 탄도미사일 발사와 관련 미사일 개발 관련자 5명을 안보리 제재 대상에 추가 지정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하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보류 요청'으로 관련 논의는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AP=연합뉴스]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유엔 주재 미국 대사는 지난 12일 북한의 연이은 탄도미사일 발사와 관련 미사일 개발 관련자 5명을 안보리 제재 대상에 추가 지정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하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보류 요청'으로 관련 논의는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AP=연합뉴스]

최근엔 북한의 연이은 탄도 미사일 발사를 제지하기 위한 유엔 안보리의 제재 대상 추가 지정을 중·러가 막아섰다. 물론 안보리 결의에 대한 비토가 아닌 제재 대상 추가 지정에 대한 ‘보류 요청’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올해 들어 사나흘에 한 번 꼴로 반복되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저지하기 위한 안보리 차원의 공동대응이 무력화한 셈이다.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유엔 주재 미국 대사는 “북한이 핵 무기 프로그램을 진전시킬 수 있도록 ‘백지 수표’를 쥐여주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미얀마 사태 당시에도 안보리는 중·러의 거부권에 발목을 잡혀 ‘반쪽 대응’을 내놓는 데 그쳤다. 지난해 3월 안보리는 미얀마 평화 시위대를 유혈 진압한 군부를 규탄하고 무분별한 폭력 사용을 자제하라는 내용의 의장 성명을 채택했다.

하지만 성명에 쿠데타 정권의 위법성에 대한 규탄 내용은 담지 못했고, 군부를 상대로 한 제재 부과 등 경고도 없었다. “유엔을 포함한 국제사회는 지금 행동해야 한다. (군부를 향해) 국제사회의 표적화된 제재가 필요하다”는 사사 미얀마 연방정부대표위원회 유엔 특사의 호소가 무색해진 셈이다.

지난해 2월 미얀마 양곤에서 군부 쿠데타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시민 불복족 운동'을 촉구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서 있는 모습. [AFP=연합뉴스[

지난해 2월 미얀마 양곤에서 군부 쿠데타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시민 불복족 운동'을 촉구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서 있는 모습. [AFP=연합뉴스[

당초 의장 성명 초안엔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 행위를 명시하고, 쿠데타 정권에 대한 제재를 경고하는 메시지도 담겼다. 하지만 중·러 양국의 반대에 막혀 이런 내용은 삭제됐다. 미 CNN 방송은 “미얀마의 거리와 가정에서 자행되는 폭력과 테러의 심각성에도 이번 의장 성명은 ‘예견된 타협’이었다”고 비판했다.

시리아 정부군 지원 러시아, 15차례 '거부권'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는 시리아 내전 당시 정부군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화학무기 공격사태에 대한 진상조사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등 시리아 내전 사태와 관련해서만 총 15차례의 거부권을 행사했다. [AFP=연합뉴스]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는 시리아 내전 당시 정부군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화학무기 공격사태에 대한 진상조사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등 시리아 내전 사태와 관련해서만 총 15차례의 거부권을 행사했다. [AFP=연합뉴스]

2011년 시리아 내전이 발발한 이후 줄곧 유엔 안보리 차원의 군사 행동과 적극적 개입이 불발된 것 역시 러시아의 계속된 거부권 행사 때문이었다. 러시아는 2018년 12월 시리아에 대한 인도주의 지원을 연장하는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했고, 같은 해 4월엔 시리아 정부군 소행으로 의심되는 화학무기 공격사태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독립적인 조사기구를 구성하자는 결의안도 거부했다.  

당시 러시아가 거부권을 사용한 건 진상조사를 거쳐 시리아 정부군이 화학무기를 사용했다는 정황이 드러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란 분석이 많았다.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국 대사 역시 “러시아가 제출한 결의안은 시리아의 '알아사드 정권'을 보호하려는 목적이 다분하다”며 러시아의 거부권 남용을 비판했다. 이외에도 시리아 정부군을 지원하는 러시아는 시리아 내전과 관련한 결의안에만 총 15차례의 거부권을 사용했다.

이-팔 사태 땐 미국이 '거부권 남용' 

지난해 5월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인 가자시 남부의 칸 유니쉬 지역의 한 건물이 불길에 타오르는 모습. [AFP=연합뉴스]

지난해 5월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인 가자시 남부의 칸 유니쉬 지역의 한 건물이 불길에 타오르는 모습. [AFP=연합뉴스]

‘자국 우선주의’로 거부권을 남용한 것은 미국 역시 마찬가지다. 안보리는 지난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 잇따라 회의를 소집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최대 우방국인 미국은 회의 때마다 거부권을 행사하며 안보리 차원의 공동성명 도출을 저지했다.  

당시 안보리에선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에서 시위를 벌이는 팔레스타인 민간인에게 발포하며 이-팔 사태가 시작된 만큼 이스라엘의 민간인 공격을 규탄하고 민간인 보호를 촉구하는 의견이 다수였다. 하지만 미국은 “팔레스타인 쪽에 심각하게 치우친 성명”이라는 이유를 앞세워 매 회의마다 의장 성명 발표를 거부했다.  

"거부권 때문에 국제평화 달성 실패할 수도"
이같은 거부권 남용은 유엔 안보리 개혁을 논의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핵심 의제다. 2020년 11월 당시 볼칸 보즈키르 유엔 총회 의장은 안보리 개혁 방안을 논의하는 토론에서 “각종 이익을 둘러싼 소속 국가 간 갈등과 거부권 남용으로 안보리의 효과는 제한적이었다”고 비판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2016년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거부권을 문제삼으며 유엔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로이터=연합뉴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2016년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거부권을 문제삼으며 유엔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로이터=연합뉴스]

그에 앞서 2016년 11월엔 당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정상회의 폐막식에서 "안보리에선 5개 상임이사국 중 하나가 전 세계를 구속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며 "유엔이 개혁되지 않는 한 국제평화를 달성하는 것은 매우 어렵거나 실패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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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임이사국의 거부권을 둘러싼 문제의식이 확산하며 그간 집단학살·전쟁범죄·인종청소·반인륜범죄 등 이른바 ‘4대 범죄’에 대해선 거부권을 제한하는 방안 등이 안보리 개혁안으로 꾸준히 논의됐다. 하지만 이 역시 개혁 대상인 상임이사국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됐다. 상임이사국의 거부권 남용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마저 거부권 행사로 논의가 멈춰선 셈이다.

오준 전 유엔 주재 대사는 “상임이사국의 절대적 거부권을 개혁하기 위한 여러 방안이 나왔지만 러시아의 경우 ‘특권이 조금이라도 삭감되는 개혁안엔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는 등 상임이사국의 동의를 얻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5개 상임이사국이 안보리에서 절대적 지위를 갖는 구조를 해소하기 위해선 유엔 회원국의 국력을 주기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 지표를 만들고, 국력에 상응하는 특권을 부여하는 방안이 장기적인 관점에선 보다 합리적인 개혁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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