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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옵서버석서 회원석까지, 1m 가는데 42년 걸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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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91년 유엔 동시 가입 후 악수하는 이상옥 외무장관(왼쪽)과 강석주 북한 외교부 제1 부부장. [중앙포토]

91년 유엔 동시 가입 후 악수하는 이상옥 외무장관(왼쪽)과 강석주 북한 외교부 제1 부부장. [중앙포토]

남북 유엔 동시가입 막전막후
한국, 1949년 첫 가입 신청서 제출
소련 거부권 행사, 다섯번이나 부결

89년 고르비의 냉전 종식이 길터
91년 리펑, 김일성 만나 최후통첩
같은해 9월 유엔 회원국 최종승인

“이미 사전에 이해가 이뤄진 데 따라 새로운 회원국들을 받아들일지에 대해 투표 없이 진행합니다. 반대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군요. 이에 따라 북한과 한국의 유엔 가입 권고 결의안을 채택합니다.”

1991년 8월 8일 뉴욕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남북의 유엔 동시 가입이 사실상 승인되는 순간이었다. 회의 결과인 안보리 결의 702호는 ‘남북한의 신청을 각기 검토한 결과 양국 모두의 가입을 권고한다’는 내용의 짤막한 세 문장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 세 문장을 위해 뛴 기간이 42년이었다. 전쟁으로 국토가 초토화됐던 나라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유엔에 입성했다.

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선포 기념식. 이듬해 1월 한국은 유엔 가입을 시도했다.

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선포 기념식. 이듬해 1월 한국은 유엔 가입을 시도했다.

◆ 소련에 막힌 5전 5패=정부는 48년 유엔으로부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받은 뒤 이듬해 1월 처음으로 유엔 가입 신청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거부권을 가진 안보리 상임이사국 옛 소련이 반대해 부결됐다. 56년까지 다섯 번 도전했지만, 모두 소련의 거부권 행사에 막혔다. 냉전 시대 미·소 대결의 희생양이었다.

한동안 중단됐던 정부의 유엔 가입 노력은 73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6·23 선언’을 통해 “북한의 유엔 가입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발표하며 전환점을 맞았다.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는 대한민국이지만, 유엔이라는 체제에서는 북한을 사실상 국가로 인정하겠다는 선언이었다. 하지만 같은 날 김일성 북한 주석은 ‘조국 통일 5대 강령’을 발표하고 “단일한 고려연방공화국 국호에 의한 유엔 가입”을 주장했다. 유엔 가입 당시 외무부 유엔과장이었던 이규형 전 주중 대사는 “당시 김일성은 남북한이 각기 유엔에 가입하면 한반도의 분단이 영구화한다며 반대했다”고 돌아봤다.

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 모습. 소련은 앞서 88 서울올림픽 참석을 공식화했다.

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 모습. 소련은 앞서 88 서울올림픽 참석을 공식화했다.

◆ 거대한 변화의 조류=하지만 시대의 조류가 바뀌기 시작했다. 국제적으로는 냉전 체제가 해체됐고, 국내적으로는 동서 진영이 모두 참여해 치러진 88 서울올림픽으로 큰 파도가 일었다. 뒤이어 89년 12월에는 조지 HW 부시 미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몰타 정상회담에서 냉전 종식을 공식 선언했다. 노태우 정부는 이런 해빙 분위기를 활용해 북방외교에 나섰고, 90년 9월 소련과 수교까지 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중국과 무역대표부 설치에 합의했다.

89년 회담하는 조지 HW 부시 미 대통령(왼쪽)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89년 회담하는 조지 HW 부시 미 대통령(왼쪽)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매번 발목을 잡았던 소련의 거부권은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됐다. 관건은 또 다른 거부권을 가진 중국이었는데, 이내 묘한 기류가 감지됐다. 이규형 전 대사는 90년 가을 외무부 본부로 날아온 홍콩발 전문을 받은 순간을 지금도 기억한다. “아, 이제 다 됐다”고 주먹을 불끈 쥘 만한 사건이었다. 그는 “당시 중국 신화사 홍콩분사는 중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대사관 같은 역할을 했는데, 거기 부판무관이 우리 홍콩 총영사를 만나 ‘한국이 올해는 가입 신청을 하지 말아달라’고 했다”며 “올해에는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은 ‘내년에는 관계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메시지였다”고 돌아봤다.

최전선인 뉴욕에서도 급박하게 움직였다. 91년 4월 5일 한국은 “대한민국 정부는 91년도 총회에서 유엔 가입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문서를 안보리에 제출했다. 북한이 입장을 바꿔 동시 가입에 응하게 하기 위한 ‘선(先)가입 압박수’였다. 노창희 당시 주유엔 대사는 회고록에서 이를 “루비콘강을 건너는 각오로 만든 출사표이자 북·중을 향한 최후통첩”이라고 표현했다.

90년 수교합의서에 서명한 최호중 외무장관(오른쪽)과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

90년 수교합의서에 서명한 최호중 외무장관(오른쪽)과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

◆ 중·소의 막판 대북 압박=이때쯤 북한의 상황은 어땠을까. 주영국 북한 공사 출신의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91년 5월 중국 리펑(李鵬) 총리가 평양을 방문,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 등을 설명하면서 ‘북한이 반대하더라도 중국은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는 최후통첩을 김일성에게 하고 돌아갔다”고 설명했다. 얼마 뒤에는 북한 주재 소련 대사도 비슷한 입장을 북한에 전했다. 판은 이미 기울어졌고, 그 사이 유엔에서는 남북 대사가 만나 의미심장한 문답을 주고받았다.

91년 리펑 중국 총리(왼쪽)는 김일성 주석을 만나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지지” 최후통첩을 했다.

91년 리펑 중국 총리(왼쪽)는 김일성 주석을 만나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지지” 최후통첩을 했다.

91년 5월 27일 박길연 주유엔 북한 대사가 노창희 대사에게 면담을 요청하더니 “동시 가입이 어려울 경우 한국이 단독 가입하겠다는 뜻에 변함이 없느냐”고 세 번에 걸쳐 확인한 뒤 돌아갔다. 한국이 이미 공개적으로 밝힌 입장을 재확인하는 데 그친 이 싱거운 문답은 결국 북한이 입장을 바꾸기 전 명분을 쌓기 위한 마지막 요식행위였다는 사실이 불과 몇 시간 뒤 드러났다. 북한 외무성은 이튿날인 5월 28일 공식 성명을 통해 “남조선에 의해 조성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유엔 가입을 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며 동시 가입을 수용했다.

◆ 1m를 건너기까지=더는 걸림돌이 없었다. 북한은 91년 7월 8일, 한국은 8월 5일 가입 신청서를 제출했다. 제46차 유엔 총회 개막일인 91년 9월 17일 회의에서 북한은 160번째, 한국은 161번째 회원국으로 나란히 최종 승인됐다. 이상옥 외무부 장관은 “한반도에서 냉전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새로운 출발을 예고하는 날이 되길 기원한다”며 동시 가입의 감회를 밝혔다. 유엔 총회 회의장에서 옵서버의 자리에서 회원국 자리까지는 통로 하나를 사이에 둔 불과 1m 거리. 하지만 우리에게는 너무나 멀었던 1m를 42년이 걸려 뛰어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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