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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돌한 '신참' 한국, 안보리 입성…'준비된 회원국'은 달랐다 [유엔 가입 30년 ②]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은 시작부터 유엔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1948년 12월 11일 유엔 총회 결의 195호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인정받았다. 유엔군의 6ㆍ25 전쟁 파병 근거가 된 건 1950년 6월 27일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 83호였다.

 하지만 유엔은 자기가 낳은 자식을 쉽게 품지 않는 엄한 부모 같았다. 미국과 옛 소련의 대립구도로 수십년 간 한국의 유엔 가입은 좌절됐고, 냉전이 끝난 뒤인 1991년에야 유엔에 입성했다. 이후 유엔 사무총장 배출, 두 차례의 안보리 비 상임이사국 수임 등 한국은 ‘준비된 회원국’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중앙일보는 한국의 유엔 가입 30주년을 맞아 한국 ‘유엔 외교’의 과거와 현재를 짚어본다.

②유엔을 움직인다…'야심만만' 안보리 입성기  

1950년 6월 27일 유엔 안보리 회의. 6ㆍ25 전쟁 발발에 대응하기 위해 모인 이사국들은 찬성 7표 대 반대 1표로 유엔군 파병의 근거를 담은 결의 83호를 채택했다. 찬성 의사를 밝히기 위해 손 든 대표들이 보인다. 유엔 포토

1950년 6월 27일 유엔 안보리 회의. 6ㆍ25 전쟁 발발에 대응하기 위해 모인 이사국들은 찬성 7표 대 반대 1표로 유엔군 파병의 근거를 담은 결의 83호를 채택했다. 찬성 의사를 밝히기 위해 손 든 대표들이 보인다. 유엔 포토

“지난 이틀간의 상황으로 우리는 가까운 장래에 대해 극도의 불안감을 갖게 됐습니다. 많은 이들이 3차 세계 대전의 시작이라는 공포를 느끼고 있습니다. 국제 평화를 유지할 일차적 책임을 진 기구로서, 끔찍한 짐이 우리에게 지워졌습니다.”

1950년 6월 27일 오후 3시. 6ㆍ25 전쟁 발발 이틀 만에 소집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를 시작하며 의장이 한 발언이다. 소련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8시간 5분 뒤 찬성 7표 대 반대 1표로 채택된 안보리 결의 83호는 북한의 남침을 ‘평화 파괴 행위’로 결정하고, 유엔군 파병의 근거를 제시했다.

‘군사력 동원’도 결정, 막강 기구

안보리는 이처럼 평화를 파괴하는 행위에 대해 군사력 동원을 포함한 대응 조치를 권고할 수 있는 막강한 기구다. 동시에 회원국들에 구속력을 갖는 결정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유엔 기관이다.

유엔헌장 25조는 “회원국은 안보리의 결정을 이 헌장에 따라 수락하고 이행할 것을 동의한다”라고도 규정한다. 주권을 일부 양보하는 것으로까지 간주할 수 있는 해당 조항을 수락해야 유엔 회원국이 될 수 있다.

유엔 헌장 12조는 안보리가 다루는 분쟁 사안에 대해서는 총회조차도 아무런 권고를 할 수 없게 하고 있다. 유엔 총회도 침범할 수 없는 안보리의 배타적 권한을 인정하는 셈이다.

가입 1년 8개월만에 이사국 도전

유엔군 파병이라는 안보리의 결정 덕에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할 수 있었던 나라, 대한민국. 합법 정부 인정 뒤 유엔에 가입하기까지는 42년이나 기다려야 했지만,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은 그로부터 불과 5년 만에 이뤄냈다. ‘준비된 회원국’으로서의 참모습을 드러낸 한국 외교사의 쾌거였다.

정부가 안보리 진출을 결정한 건 93년 5월이었다. 유엔 가입일이 91년 9월 17일이었으니, 불과 1년 8개월 만이었다. 마치 이제 막 전입한 전학생이 반장 선거에 달려드는 격이었다. 이렇게까지 서두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대한민국의 첫 안보리 이사국 선출 소식과 의미를 전한 1996년 11월 9일자 중앙일보 지면.

대한민국의 첫 안보리 이사국 선출 소식과 의미를 전한 1996년 11월 9일자 중앙일보 지면.

비상임이사국이 되려면 총회 투표에서 회원국 3분의 2 이상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결국 선거전이란 이야기다.

‘붙을 만 한 상대’ 선택이 필수  

사실 자신의 실력만 담보된다면, 선거에서 가장 큰 변수는 상대 후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보리 이사국 투표 역시 마찬가지다. 자기가 하고 싶은 연도를 고르는 게 아니라, ‘해볼 만 한 상대’가 나오는 해에 도전장을 내미는 게 필승 전략이다.

오준 전 주유엔 대사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유엔에는 5개 지역 그룹(아프리카, 아시아ㆍ태평양, 동구, 중남미, 서구 및 기타 그룹)이 있는데, 비상임이사국 열 자리 중에 53개국으로 구성된 아시아 지역 그룹에 배정되는 것은 두 자리, 즉 매년 한 자리뿐”이라며 “이를 차지하려는 경쟁은 점점 더 치열해져서 이제는 10년 뒤에 이뤄질 선거에 미리 입후보하는 것도 빠른 게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또 “가입까지는 오래 걸렸지만 그만큼 옵서버로서 풍부한 경험을 쌓은 우리나라는 처음부터 비상임이사국 진출을 노렸다. 아시아 국가들의 입후보 상황을 유엔 가입 직후부터 스터디한 결과 96~97년 임기에 도전장을 냈다”고 돌아봤다.

그는 한국이 유엔 가입 직후인 93년에 유엔 평화유지군(PKO) 활동에 참여하기로 한 것도 안보리 진출을 위한 ‘큰 그림’이었다고 설명했다. “PKO 파병이야말로 국제 평화와 안보에 대한 구체적인 기여로, 이런 것들도 안보리 진출을 염두에 두고 전략적 의도를 갖고 추진한 것”이었다는 설명이다.

1997년 5월 박수길 당시 주유엔 대사가 안보리 의장 자격으로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유엔 포토

1997년 5월 박수길 당시 주유엔 대사가 안보리 의장 자격으로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유엔 포토

 “스리랑카, 너로 골랐다” 야심찬 도전

 그렇게 선택한 경쟁자는 스리랑카였다. 사실 당시 스리랑카에는 걸출한 외교관이 있었다. 직전에 핵확산금지조약(NPT) 연장회의 의장을 맡아 NPT 무기한 연장을 성공시킨 자얀타 다나팔라 대사.

훗날 군축 담당 사무차관까지 지낸 유엔의 ‘인싸’를 한국이 제압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약간의 운도 따랐다. 박수길 당시 주유엔 대사는 국립외교원 오럴 히스토리 총서 ‘한국 외교와 외교관’에서 이렇게 돌아봤다.

“사실 스리랑카도 애초에 그런 인물이 있으니 안보리 진출을 추진한 겁니다. 그런데 당시 스리랑카 정권이 바뀌면서 다나팔라를 지지하던 대통령이 교체됐습니다. 본국의 강력한 지지를 등에 업고 안보리 진출 운동을 하기에 지장이 생긴 겁니다.”

이를 간파한 정부는 스리랑카에 실리를 챙겨줌으로써 이른바 ‘품위 있는 후퇴(decent withdrawal)’를 유도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실리 챙겨주고 양보 유도

박수길 전 대사는 “그때 아마 우리가 스리랑카에 어느 정도 경제적인 지원을 했을 거다. 그렇게 대화를 통해 강력한 경쟁자가 양보하도록 만들었고, 우리로선 그 이상 기쁨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1997년 5월 유종하 당시 외무부 장관이 안보리 의장 자격으로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유엔 포토

1997년 5월 유종하 당시 외무부 장관이 안보리 의장 자격으로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유엔 포토

오준 전 대사는 “결국 결정적인 것은 스리랑카가 한국과의 관계를 대립보다는 우호적으로 가져가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양보한 것으로 봐야 한다”며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국력과 직결되는 문제”라고 말했다.

(※다나팔라 대사는 2006년 유엔 사무총장 선거 때도 반기문 총장과 겨루다 예비 투표 과정에서 중도 사퇴했다. 유엔 선거 때마다 한국과 묘한 인연이 있는 셈이다. 그는 2001년 2월 군축 강연회 기조연설차 처음 방한했는데, 박수길 전 대사가 만찬을 대접하며 그를 환영했다.)

‘최고득표’ 목표…44개국에 특사

스리랑카의 중도하차로 아시아 지역 유일의 출마국이 된 정부는 이제 최고 득표를 목표로 삼았다.

44개국에 대통령 특사반(14개)을 파견했고, 선거 현지 총괄 역할을 맡은 박수길 전 대사는 매주 한두 차례씩 각국 대사들을 관저로 초청했다. 당시 185개 회원국 중에 유일하게 빠진 건 박길연 주유엔 북한 대사뿐이었다고 한다.

최대한 많은 표를 획득하기 위해 정부는 마지막 세심한 부분까지 주의를 기울였다. 한국의 공식 영문 국명은 ‘Republic of Korea’인데, 투표용지에 ‘Korea’라고만 쓰면 무효표로 처리되는 게 규칙이었다. 북한(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으로도 간주될 수 있어서다.
이에 정부는 투표 직전 ’South Korea‘만이라도 한국 유효표로 인정해달라고 유엔 사무국에 공식 요청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95년 11월 8일 유엔 총회에서 이뤄진 투표에서 한국은 177표 중 156표(선출 기준은 118표)를 얻었고, 무효표는 한 표도 없었다. 다만 사전에 계산한 것보다 이탈표가 10여표 정도 나오면서 최고 득표라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아시아그룹 3파전, 고난도 2차 도전

한국의 두 번째 안보리 진출 시도는 2013~2014년 임기 때였다. 이때는 훨씬 치열한 선거전이 벌어졌다. 한국 외에도 아시아 지역 그룹에서 캄보디아와 부탄이 출마, 세 나라가 한 자리를 두고 다투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2012년 10월 한국이 안보리 이사국으로 선출되고 나서 김숙 유엔 대사와 에두아르도 울리바리 코스타리카 유엔 대사가 축하의 포옹을 나누는 모습. 연합뉴스

2012년 10월 한국이 안보리 이사국으로 선출되고 나서 김숙 유엔 대사와 에두아르도 울리바리 코스타리카 유엔 대사가 축하의 포옹을 나누는 모습. 연합뉴스

특히 캄보디아는 동남아국가연합(ASEANㆍ아세안) 의장국이라 동남아 국가들의 몰표가 예상됐다. 부탄의 경우엔 개발도상국이라는 점에서 안보리에 진출할 수 있도록 지지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유엔 내에 일부 있었다.

하지만 한국은 이미 한 번 안보리 이사국 수임에 성공한 경험이 있는 데다 유엔 사무총장까지 배출, 유엔 선거의 노하우를 습득한 터였다. 외교부는 유엔 회원국을 ▶(한국 안보리 진출에)찬성 ▶찬성 의사는 표시 ▶반대 ▶반대하지만 입장 바꿀 가능성이 있음 등 네 개 그룹으로 나눠 집중 공략하는 각개 전투식 선거전에 돌입했다.

압도적 지지, 단판 승부 원했지만…

안보리 이사국 결정 투표는 무기명으로 이뤄지며, 결선투표가 없다. 한 나라가 3분의 2 이상을 득표할 때까지 회수 제한 없이 투표를 반복한다. 수십 차례에 걸쳐 투표가 이뤄지는 경우도 있다.

2013년 12월 반기문 당시 유엔 사무총장(가운데)과 15개 안보리 이사국 대표들이 함께 찍은 사진. 반 총장 오른쪽 둘째가 오준 당시 주유엔 대사. 유엔 포토

2013년 12월 반기문 당시 유엔 사무총장(가운데)과 15개 안보리 이사국 대표들이 함께 찍은 사진. 반 총장 오른쪽 둘째가 오준 당시 주유엔 대사. 유엔 포토

한국은 1차 투표에서 승부를 내는 게 목표였다. 투표 전 이미 충분한 표(193표 중 128표 필요)를 확보했다는 게 내부 판단이었지만, 첫 도전 때도 경험했듯이 10% 정도의 이탈표를 고려해야 했기에 안심할 수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2012년 10월 18일 열린 총회의 1차 투표 결과는 한국 116표, 캄보디아 62표, 부탄 20표였다. 여덟 표가 부족해 2차 투표를 치르게 된 것이다.

2차 투표까지 정회 시간은 25분. 유엔 대표부는 1차 투표에서 탈락한 부탄의 지지표를 확보하는 막간 득표전에 나섰다.

곧이어 진행된 2차 투표 결과는 한국 149표, 캄보디아 43표였다. 부탄 지지표뿐 아니라 캄보디아 표까지 일부 이동한 결과였다.

2014년 5월 오준 당시 주유엔 대사가 안보리 의장 자격으로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유엔 포토

2014년 5월 오준 당시 주유엔 대사가 안보리 의장 자격으로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유엔 포토

세 번째 도전 시작, 준비는 끝났다

정부는 유엔 가입 30주년인 올해 세 번째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도전을 선언했다. 2024~2025년 임기인데, 현재로썬 아시아 지역 그룹에서 다른 경쟁국은 없다. 사실 해당 임기에 나오려는 다른 후보국이 있었지만, 이미 ’품위 있는 후퇴‘ 유도에 성공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번 도전에 성공한다면 안보리 진출 간격이 17년에서 11년으로 줄어든다. 유엔 대사를 지난 외교관들은 “우리 국력을 생각하면 이제 적어도 10년에 한 번은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에 진출해야 한다”고 입을 모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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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 비상임이사국 첫 수임 때만 해도 국내에선 당장 “안보리에 들어가면 유엔에 대한 각종 기여금도 더 많이 내야 할 텐데 큰일”이란 걱정이 나왔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유엔 분담금 규모는 세계 11위(2020년 기준). 올해에는 처음으로 10위권 진입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유엔이 낳은 자식이 이제 유엔을 지탱하는 하나의 기둥이 됐다.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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