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이 막은 유엔의 문···한국은 수십년 '셋방살이' 버텼다 [유엔 가입 30주년 ①]

중앙일보

입력 2021.08.22 05:00

업데이트 2021.09.14 09:45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은 시작부터 유엔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1948년 12월 11일 유엔 총회 결의 195호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인정받았다. 유엔군의 6ㆍ25 전쟁 파병 근거가 된 건 1950년 6월 27일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 83호였다.
 하지만 유엔은 자기가 낳은 자식을 쉽게 품지 않는 엄한 부모 같았다. 미국과 옛 소련의 대립구도로 수십년 간 한국의 유엔 가입은 좌절됐고, 냉전이 끝난 뒤인 1991년에야 유엔에 입성했다. 이후 유엔 사무총장 배출, 두 차례의 안보리 비 상임이사국 수임 등 한국은 ‘준비된 회원국’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중앙일보는 한국의 유엔 가입 30주년을 맞아 한국 '유엔 외교'의 과거와 현재를 짚어본다.

①42년 걸친 ‘유엔 입성’ 도전기, 그 막전막후 [상(上)]

1991년 남북은 각각 161번째, 160번째로 유엔 회원국으로 동시 가입했다. 특히 한국 정부는 42년간의 노력 끝에 일궈낸 성과였다. [유엔 제공]

1991년 남북은 각각 161번째, 160번째로 유엔 회원국으로 동시 가입했다. 특히 한국 정부는 42년간의 노력 끝에 일궈낸 성과였다. [유엔 제공]

 “이미 사전에 이해가 이뤄진 데 따라 새로운 회원국들을 받아들일지에 대해 투표 없이 진행할 것을 제안합니다. 반대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군요. 이에 따라 북한과 한국의 유엔 가입 권고 결의안을 채택합니다.” 

1991년 8월 8일 목요일 뉴욕 유엔 본부.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남북의 유엔 동시 가입이 사실상 승인되는 순간이었다. 의장을 맡은 아얄라 라쏘 주유엔 에콰도르 대사는 “이는 양국뿐 아니라 아시아 대륙, 더 나아가 전세계에 역사적 사건”이라며 “우리는 한때 적이었던 국가들이 자국민의 행복이라는 공동의 이익을 위해 이견은 제쳐놓고, 필요한 힘을 찾아내는 것을 목격했다”며 축하 발언을 했다.

1991년 9월 17일 남북 유엔 동시 가입 직후 악수를 나누고 있는 이상옥(왼쪽) 외무장관과 강석주 북한 외교부 부부장. [중앙포토]

1991년 9월 17일 남북 유엔 동시 가입 직후 악수를 나누고 있는 이상옥(왼쪽) 외무장관과 강석주 북한 외교부 부부장. [중앙포토]

오전 11시에 시작된 회의가 종료한 건 오전 11시 35분. 회의 결과인 안보리 결의 702호도 ‘남북한의 신청을 각기 검토한 결과 양국 모두의 가입을 권고한다’는 내용의 짤막한 세 문장이 전부였다. 하지만 불과 35분의 회의, 세 문장의 결의안 채택을 위해 뛴 기간이 42년이었다. 결론은 남북 동시가입이라는 ‘해피 엔딩’이었지만, 그 뒤에는 사활을 건 치열한 남북 간 외교전이 있었다.

내전을 겪고 국토가 초토화됐던 나라가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 유엔 회원국의 위상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짚어본다. 역사적 기록의 의미이자, 지금까지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국제적 저력의 근원 분석이다.

#40~50년대 소련에 막힌 5전5패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선포 기념식. 당시 한국 정부는 유엔으로부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받은 직후 곧장 유엔 가입을 시도했다. [중앙포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선포 기념식. 당시 한국 정부는 유엔으로부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받은 직후 곧장 유엔 가입을 시도했다. [중앙포토]

정부는 1948년 유엔으로부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받은 뒤 49년 1월 처음으로 유엔 가입 신청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거부권을 갖고 있는 안보리 상임이사국 옛 소련의 반대로 부결됐다.

같은해 11월 재심 신청도, 6ㆍ25 전쟁 뒤인 55년 12월 미ㆍ중의 한국ㆍ월남 가입 동시 권고 제안도 모두 소련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됐다. 56년에는 미국을 비롯, 13개국의 지원사격이 있었지만 여전히 소련은 요지부동이었다.

1948년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환영하기 위해 늘어선 인파. [국가기록원 제공]

1948년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환영하기 위해 늘어선 인파. [국가기록원 제공]

유엔 헌장 4조에는 ‘평화 애호국’이라면 누구나 유엔 회원국 지위를 가질 수 있게 돼 있다. 대한민국이 평화를 애호하지 않는 것도, 국가가 아닌 것도 아닌데 번번이 가입 길이 막힌 건 철저히 냉전시대 미국 대 소련의 대결로 인해 희생양이 된 탓이었다.

좌절만 맛본 5전 5패. 결국 정부의 유엔 가입 노력도 70년대까지 중단됐다.

#남북, 장외서 체제 경쟁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3년 북한의 유엔 가입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6.23 선언을 발표했다. [중앙포토]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3년 북한의 유엔 가입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6.23 선언을 발표했다. [중앙포토]

정부의 유엔 가입 정책이 중대한 전환점을 맞은 건 73년이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6ㆍ23 선언’을 통해 “북한의 유엔 가입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헌법상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는 대한민국이지만, 유엔이라는 체제에서는 북한을 사실상 국가로 인정하겠다는 선언이었다.  

하지만 같은날 김일성 북한 주석은 ‘조국 통일 5대 강령’을 발표하고 “단일한 고려연방공화국 국호에 의한 유엔 가입”을 주장했다. 유엔 가입 당시 외무부 유엔과장이었던 이규형 전 주중 대사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김일성 주석은 남북한이 각기 유엔에 가입하면 한반도의 분단이 영구화한다며 반대했고, 이는 국내적으로도 정치적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다”고 돌아봤다.

사실 70년대는 유엔에서 남북 간 체제 경쟁이 가장 치열한 시기였다. 하나라도 더 많은 국가와 수교하고, 한반도 문제와 관련한 사안에서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을 대상으로 집중적인 외교전을 벌였다. 유엔에서는 국력과 관계없이 모든 회원국이 동등하게 한 표씩 보유하기 때문이었다.

#서럽디 서러운 옵서버 신세

사실 한국은 이런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면서도 직접 한반도 관련 결의안을 제출할 자격이 없었다. 회원국이 아닌 옵서버였기 때문이다.

박수길 전 주유엔 대사. [중앙포토]

박수길 전 주유엔 대사. [중앙포토]

박수길 전 주유엔 대사는 “옵서버란 건 겨우 발언권을 한 번씩 얻어서 말 한 번 하면 그것으로 좋아하며 (외무부)본부에 보고하고 그랬다. 그때 한국의 신세란 건 한반도와 관련한 결의안에 대한 지지국을 서로 많이 얻기 위해 뛰는 게 유엔 외교의 큰 내용이 돼버렸다”(국립외교원 오럴 히스토리 총서 ‘한국 외교와 외교관’ 중)고 돌아봤다.

회원국이 아니니 유엔에 대사를 주재시킬 수도 없었다. 뉴욕 총영사관으로 발령낸 뒤 유엔 외교 업무를 보게 하는 식의 편법으로 수십년을 버텼다

#거대한 조류의 변화, 드디어 온 기회

소련이 1988년 서울올림픽 참석을 공식화하는 등 냉전 체제가 서서히 해체됐다. 사진은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 [중앙포토]

소련이 1988년 서울올림픽 참석을 공식화하는 등 냉전 체제가 서서히 해체됐다. 사진은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 [중앙포토]

하지만 시대의 조류가 바뀌고 있었고, 한국의 유엔 가입 기회도 함께 찾아왔다. 국제적으로는 냉전 체제가 해체됐고, 국내적으로는 88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통해 큰 파도를 일으켰다. 특히 서울 올림픽은 88년 초 소련이 참가를 결정하면서 동서 진영이 모두 참여하는 역사적 이벤트가 됐다.  

이규형 전 대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돌아봤다.
“그 때만 해도 해외에서 개별적으로 동구권 외교관들을 접촉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88년 1월 말쯤인가, 제가 도쿄에서 제3국 담당 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소련 외교관이 만나자고 했어요. 거두절미하고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적어도 좋다’고 하더니 ‘소련은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기로 결정했으며, 이를 공식 통보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결국 소련도 동서 진영 간 냉전을 해소하는 흐름 속에 있었던 거죠.”

#북방외교, 기회의 틈을 넓히다  

1989년 회담을 마친 조지 H.W. 부시 미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공동 기자회견에 나선 모습. 당시 두 정상은 기자회견을 통해 냉전 종식을 공식화하는 '몰타 선언'을 발표했다. [중앙포토]

1989년 회담을 마친 조지 H.W. 부시 미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공동 기자회견에 나선 모습. 당시 두 정상은 기자회견을 통해 냉전 종식을 공식화하는 '몰타 선언'을 발표했다. [중앙포토]

뒤이어 89년 12월에는 조지 H.W. 부시 미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몰타 선언’을 통해 냉전 종식을 공식 선언했다. 세계적으로 급격하게 해빙 분위기가 조성됐고, 정부는 이를 놓치지 않고 적극적 북방외교를 펼치기 시작했다. 89년 2월 헝가리를 시작으로 동구권 국가들과 수교를 이어갔고, 90년 9월에는 소련과 수교했다. 같은해 10월에는 중국과 무역대표부 설치에 합의했다.

유엔 가입 당시 유엔 대표부 파견 서기관이었던 오준 전 주유엔 대사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냉전에서 패배한 소련이 개혁개방 정책을 통해 경제체제를 전환하면서 그 일환으로 우리도 소련과 수교가 가능해졌다”며 “냉전 체제 붕괴의 반사적 이익이 우리에게 돌아와 오랜 동안 추구했던 외교 목표인 유엔 가입을 달성한 것인데, 역사의 흐름이 그런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고 말했다.

냉전으로 인해 한국에 굳게 닫혀있던 유엔의 문이 냉전 종식과 함께 열리고 있었다. 

[하(下)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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