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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건축사 사무소, 건축 전공자도 기피하는 페이퍼 컴퍼니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손웅익의 작은집이야기(54)

건축설계 업무에서도 어느새 분업화가 되었다. 과거에는 건축사 사무소에서 건축주와 디자인에 관해 협의하고 디자인이 결정되면 건축도면과 함께 구조도면을 그렸다. 인허가 대행도 하고 시공도면이 나오면 공사비 산출을 위한 견적도 건축사사무소 직원들이 했다. 견적서를 만들 때는 여관을 잡아서 몇날 며칠 밤을 새우면서 작업했다. 인허가를 신청하거나 완료된 도면을 납품할 때는 밤새워 청사진을 구워내기도 했다. 착공하면 현장 감리를 하고 사용검사 관련 업무도 건축사 사무소에서 수행했다. 구조해석, 토목설계, 기계설계, 전기, 소방설계, 조경설계 등은 협력업체에 의뢰하고 취합해 최종 납품과 책임은 건축사 사무소에서 진다. 한마디로 건축설계의 총괄 지휘 역할을 건축사 사무소가 수행했다.

건축 설계업무가 세분화하면서 건축사 사무소의 업무도 축소되었다. 직원들은 현장에 나갈 일도 거의 없어 구조에 대한 지식이 약해졌다. [사진 pxhere]

건축 설계업무가 세분화하면서 건축사 사무소의 업무도 축소되었다. 직원들은 현장에 나갈 일도 거의 없어 구조에 대한 지식이 약해졌다. [사진 pxhere]

이렇게 프로젝트의 처음부터 완료 단계까지 많은 분야의 업무를 수행하는 건축사 사무소 직원들은 전반적인 건축 업무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건축 설계업무가 세분화하면서 건축사 사무소의 업무도 상당 부분 축소되었다. 특히 과거에 구조기술사사무소는 구조해석과 구조계산이 주 업무였으나 요즘에는 구조도면을 그려 건축사사무소에 납품하는 업무가 더 비중이 크다. 이렇게 구조기술사 사무소에서 구조도면을 작성하면 구조계산서를 근거로 건축사 사무소에서 구조도면을 그리는 것 보다 정확하고 책임소재도 명확해진다.

문제는 프로젝트 전체를 지휘해야 하는 건축사 사무소 직원들이 구조에 대한 지식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감리만 전문으로 하는 직원이 있는 건축사 사무소의 경우는 설계업무를 하는 직원이 현장에 나갈 일도 거의 없다. 그 결과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직원이 현장에서 발생하는 시공 상의 문제를 잘 알지 못하고 도면을 작성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 것이다. 특히 감리만 전문으로 하는 감리회사가 등장한 이후에는 건축사 사무소 직원은 아예 현장에 나갈 일이 없게 되었다.

또 다른 문제는 캐드와 같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도면을 양산하면서 공장에서 도자기를 찍어내는 것처럼 건축도면도 그렇게 되었다. 캐드 작업에서는 복사나 반복 작업이 너무 쉽다. 예를 들면 공사에 필요한 상세도를 새로 그리지 않고 어느 건물이나 적용해도 되는 공통 도면을 복사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건축물 주요 부위의 디테일도 새로 연구할 필요가 없다. 구조도면도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 철근의 배열, 이음이나 정착에 대한 공통 도면이 있어 그냥 복사해 도면에 끼워 넣는다. 예를 들면 바닥 슬라브에 철근을 배열하는 구조 도면의 경우 손으로 그릴 때는 적정 간격을 찍어가면서 철근 한 가닥 한 가닥을 일일이 그렸다. 바닥판 상부와 하부에 배열되는 철근의 굵기와 간격을 머릿속에 훤히 꿰뚫고 있어야 도면을 작성할 수 있었고 현장에 나가면 철근 공사가 제대로 되고 있는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속도가 중요해진 건축설계 분야는 통합적인 설계도면을 해석하고 지휘할 인력 양성이 어려워졌다. [사진 pxhere]

속도가 중요해진 건축설계 분야는 통합적인 설계도면을 해석하고 지휘할 인력 양성이 어려워졌다. [사진 pxhere]

건축설계 분야의 분업화가 진행되면서 이제는 건축도면만 전문적으로 작성하는 업체도 많이 생겼다. 대형 사무소 중에는 수주에만 집중하고 대부분의 건축도면 작성은 도면 전문 작성업체에 의뢰하기도 한다. 특히 아파트 설계의 경우는 건축사 사무소보다 도면 작성을 전문으로 하는 협력업체가 더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고 상세도면도 훨씬 잘 그린다. 아니 이제 도면을 제대로 그릴 수 있는 직원을 보유하지 못한 건축사 사무소도 많다. 건축설계에 집중하기보다 여기저기 협력업체에 일을 의뢰하고 독려하고 관리하는 일이 주 업무가 되기도 한다. 건축설계 분야에서의 페이퍼 컴퍼니인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제대로 일을 하는 건축사 사무소는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다. 건축 전공자는 이제 건축 설계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유망한 건축 전공자가 연봉도 적고 업무 성취도도 낮고 미래에 대한 비전도 불확실한 건축사사무소를 선택하지 않고 대기업 개발부서나 금융권으로 진로를 택하는 이유다.

건축설계 분야는 이제 세분화와 더불어 속도전이 되었다. 관공서 발주에서는 공사도 그렇지만 설계의 경우도 당초 정해진 설계기간을 초과하면 그에 따른 지체보상금이 있다. 설계기간이 늘어나면 손해를 보기 때문에 디자인에 좀 더 시간을 할애할 수 없다. 도면작성도 전문 업체에 의뢰해 버린다. 작금의 건축사 사무소는 오케스트라처럼 통합적으로 설계도면을 읽고 해석하고 지휘할 수 있는 인력 양성이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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