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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법질서 흔들면 안된다(사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범죄전쟁」은 사회규범 테두리 안에서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에 따른 경찰과 검찰의 후속조치를 보면서 우리는 이들 기관 스스로가 우리 사회의 기본질서와 가치를 파괴할 수 있는 발상들을 남발하고 있는 데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노 대통령이 쓴 「전쟁」이라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사회악인 범죄와 폭력에 단호히 대응하겠다는 의지의 표명 이상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경찰과 검찰의 후속조치 내용은 마치 그것이 실제의 전쟁이라도 되는 양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과 인권,그리고 법의 형평성을 무시하고 행정편의와 중형만능주의에 깊이 빠져 있다.
흉악범죄에 대한 강력한 대응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은 당국의 무기력하고 뜨뜻미지근한 대응에 불만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 요구는 어디까지나 법질서를 준수하고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를 수호하는 범위 안에서의 것이지 공권력 스스로가 법질서와 사회의 가치를 유린해도 좋다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범죄와의 전쟁이 성과를 거두려면 국민의 공감과 협력이 필수적인 조건이다. 그런데 공권력 자체가 법적 정당성과 도덕성조차 갖추지 못한다면 그 전쟁의 결과는 뻔한 것이다.
경찰과 검찰의 후속조치 내용은 이 기회에 자신들의 권한을 한껏 확대하고 범죄발생의 원인을 마치 법이 느슨한 탓인 양 호도하고 아울러 반정부세력에 대한 정치적 목적도 달성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마저 불러일으키고 있다.
경찰이 삭제하겠다고 나선 경찰관 직무집행법상의 동행거부권,동행시간의 제한,직권남용에 대한 처벌 등의 조항은 경찰의 인권유린을 견제하기 위해 오랜 논란 끝에 지난 88년말에야 겨우 삽입된 것이다.
그나마 그것이 이제까지 제대로 지켜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것의 준수는 커녕 범죄와의 전쟁을 이유로 슬그머니 삭제하려는 것은 또다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자신들은 처벌에서 면제되겠다는 발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총기 사용의 확대도 어느 정도의 필요성은 인정된다고 하지만 엄격한 훈련과 사용준칙 등에 충분한 교육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검찰의 징역상한선 상향조정이나 신속한 재판요구,흉악범에 대한 특별교육도 마치 범죄가 처벌의 강화만으로 일소될 수 있다고 보는 형벌만능의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며 사법권을 침해하고 법체계를 뒤흔들며 비록 범죄자라 해도 마땅히 지녀야 할 인권을 유린할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현행 최고 25년의 형량도 결코 낮은 것이 아니다. 그것을 50년으로 높인다고 해서 범죄가 줄어든다는 증거도 없다. 중형주의가 범죄억제에 효과적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은 차치하고라도 그것이 흉악범의 극한 행동을 유발케 하는 부작용을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또 법원에 흉악범에 대한 신속한 재판과 누범자에 대해 법정 최고형을 선고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입법조치를 요구키로 했는데 이는 인권보호를 위한 재판의 공정성을 해칠 뿐 아니라 사법권도 침해하는 것이다.
흉악범에 대해선 삼청교육을 연상시키는 유격체조 등 강도높은 특별교육을 실시할 작정이라는 데 이는 감정적 보복일 뿐 범죄억제에는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으며 그 자체가 인권침해다.
우리는 현행 법에 큰 문제가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현행 법의 엄격한 집행으로도 얼마든지 바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본다.
범죄 퇴치의 근본 목적은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의 가치와 규범을 그대로 지키는 데 있는 것이지 그 가치를 희생시키는 데 있지 않다는 상식적 원리를 「전쟁」에 임하는 당국자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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