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축구」 취재기자가 본 평양 전종구 특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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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열린 모습 담힌 마음/두얼굴 북한/민족 의식ㆍ통제체제의 이중성/PK억지ㆍ“북경 2위”… 대결 여전
물꼬는 텄지만 제방둑을 허물기는 아직 이른 감이 든다는 게 평양취재 4박5일이 남긴 솔직한 결론이다.
분단45년만의 평양나들이는 남북교류의 첫 결실인 남북 통일축구 그 자체에만 의미가 있었던 것은 분명 아니다.
이번 남북 통일축구대회를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북한 주민들 속에 뿌리깊이 내재해 있는 혈연의식와 북한 사회지도층의 편향된 독선과 아집의 2중구조였다.
순안비행장에 몰린 엄청난 인파의 환영분위기나 경기 당일 5ㆍ1경기장에 모인 15만 대관중의 열띤 함성은 순수한 동포애의 발로임에 틀림없었다.
비단 그것이 동원된 군중이고 사상과 체제에 순종하는 「북조선인민」 일지라도 남한선수들을 향한 강렬한 혈연의 정은 도처에서 엿볼 수 있었다.
공항 환영객중 조선복(한복) 차림의 부인네들은 『생전에 남쪽 축구선수가 평양에 오는 것을 보게되다니 꿈만 같다』며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는가 하면 평양 베어링공장에 근무한다는 김영희씨(여ㆍ23)는 『7일 방송을 통해 남쪽선수단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른 아침부터 공항에 나와 기다렸다』면서 『이제 통일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됐다』고 45년만의 남북한 상봉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같은 따뜻한 동포애는 남한선수들이 찾은 만남의 현장마다 예외없이 확인할 수 있었다. 이틀째 교예(서커스) 극장을 찾았을 때나 3일째 산원(산부인과병원),인민대학습당,4일째 학생소년궁전을 찾았을 때도 수천ㆍ수만의 환영인파들이 몰려 낯선 남한동포들을 기쁨으로 맞아주었다.
해맑은 미소,꾸밈 없는 환대는 아무리 색안경을 끼고 본다한들 전혀 가식 없는 몸짓임에 틀림없어 보였고 순수하게만 느껴졌다. 적어도 우리 선수 일행이 접한 북한주민들은 그랬다.
그러나 격렬한 구호일색의 시가지나 밤만 되면 사람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썰렁한 거리풍경은 남한 사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평양시가지 길목마다 나붙어 있는 플래카드중엔 『당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 『3대 혁명과업 앞당기자』는 등 섬뜩함을 주는 게 많았고 『조선 노동당 만세』 『위대한 김일성 수령님 만수무강을 기원합니다』는 등 시대착오적인 1인 숭배사상의 문구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색다른 거리풍경에 행여 서툰 질문이라도 할라치면 안대원들은 꽤나 당황해 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한결같이 『그런 소리하지 말라』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개중에는 「토론하자」며 오히려 바짝 달라붙는 측도 없지 않았다.
안내원들은 우리 일행 모두에 한사람씩 따라붙었는데 5명 단위로 조장ㆍ반장을 두어 일행의 일거수 일투족을 면밀히 관찰,상부에 보고하는 절차를 밟았다. 아침 저녁으로 안내원들 끼리 모여 밀담을 나누는 장면이 여러차례 목격되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일반 안내원들은 대체로 함구하는 편이었고 이들의 중간 리더격인 조장이나 반장 안내원들은 훨씬 적극성을 갖고 일행을 맞는 인상을 짙게 풍겼다.
철저한 통제체제의 한 단면을 보인 셈이었다. 다만 색다른 것은 이들의 2중성.두명이상 모이면 으레 김일성 주석에 대한 찬사나 공산주의의 우월성을 자랑삼아 늘어놓는 그들이었지만 반면 단둘이 만나 얘기를 나눌 때는 곧잘 남한쪽 얘기를 귀담아 듣고 공감하는 모습이어서 큰 대조를 보였다. 겉과 속이 다른 사회분위기는 우리 일행 모두가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12일 저녁 환송연에서 들려준 북한작가동맹 소속 한 작가의 남북사회 비교론은 비록 접근방식의 차이는 있었지만 이질화돼 있는 남북사회의 단면을 꿰뚫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한 뒷맛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지난해 펜클럽 주최 시낭송회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 이 작가의 논리는 간단했다. 『남한 사회는 주민 저마다가 각기 다른 목소리를 갖고 있는데 반해 북한 사회는 서로 다른 목소리를 한데 묶어 한소리를 낸다. 이 점에서 김일성 수령님의 위대함이 있다』는 게 그의 논리였다.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남북간에는 엄청난 벽이 현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시사였다.
남북교류를 보는 시각도 이런 관점에서 짚어 볼 수 있다. 남북통일 축구대회에서 드러난 북한 심판의 억지승부 조작이나 북한 주민들이 북경아시안게임에서 북한이 2위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심판의 억지승부 조작이 결코 조작이나 고의가 아닌 단순한 우발적인 실수쯤으로 여기는 게 우리의 기본 시각이다. 그러나 그 심판의 심저에 깔린 「남한을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잠재의식이 이런 불상사를 일으킨 주범 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부인하기 힘들다.
더욱이 북한 주민들이 북한이 한국을 앞서 2위 했다고 알고 있는 사실은 북한당국이 주민들을 어떻게 통제하고 사회를 조작하고 있는지를 알게하는 대목이며 그것은 틀림없는 「북한의 한계」처럼 받아들여졌다.
실상은 접어두고 체제유지에 유익한 것만 보도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철저히 차단,봉쇄하고마는 정보의 사전통제,관리가 바로 그것이다.
또 한가지 북경대회에서 이룬 남북합동 응원단 합의에서 남북통일축구에 이르기까지 남북 대화는 거의 북한측의 주도로 이끌려 왔다는 사실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측은 이같은 일련의 남북대화에 대비,사전에 충분한 준비작업을 해온 데 반해 남한측은 전혀 그렇지가 못했다. 심지어 북경대회 때는 수천개의 남북한 단일기를 미리 준비해와 경기장 마다 뿌리는 등 물량공세를 펼쳐 한국을 압도할 정도였다.
선수단의 평양방문 마지막날 이뤄진 남북 체육회담 재개등 5개항으로 된 합의서 또한 북한측이 주도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북한측은 공개석상 마다 남북교류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은연중 남북기자들에게 합의문항의 일부를 흘리는 등 사전 분위기 조성에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그만큼 남북교류에 대한 북한측의 전략적 운용은 집요했고 치밀했으며 이 점을 남한측 실무관계자들도 인정했다.
짧은 일정이나마 북한주민ㆍ북한 사회의 일면을 보고 듣고 확인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큰 수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재개될 남북대화나 나아가 조국통일에 이르는 길은 두텁고 험한 가시밭길이라는 게 이번 평양취재가 남긴 교훈이다.
북한을 「통일의 동반자」로 삼아 너그럽게 포용하는 아량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됨은 물론이다.
그렇지만 맹목적ㆍ심정적 통일의지만을 앞세워 남북대화에 나서는 일은 마땅히 지양돼야 하며 보다 깊은 북한사회에 대한 이해와 그 속에 도사린 반화합ㆍ반통일적 요소의 제거 노력이 뒷받침돼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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