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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대한민국 해안을 다 잇게 됐다, 코리아둘레길 비사[뉴스원샷]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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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 레저팀장의 픽 - 코리아둘레길 올가이드

동해안 종주 트레일 해파랑길의 21 시작점인 영덕 해맞이공원. 영덕 블루로드 B코스 구간이기도 하다.

동해안 종주 트레일 해파랑길의 21 시작점인 영덕 해맞이공원. 영덕 블루로드 B코스 구간이기도 하다.

2022년 관광 부문 최대 뉴스는 단연 서해랑길 개통일 겁니다. 전남 해남 땅끝마을에서 인천 강화도 평화전망대까지 서해안을 따라 무려 1800㎞ 길이의 초대형 트레일이 연결됩니다. 정식 개통 전인데도 벌써 길을 걷는 사람이 많다네요.

서해랑길 개통은 여러모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서해랑길이 개통함으로써 대한민국의 해안 경계를 잇는 해안 둘레길이 완성됩니다. 동해안 종주 트레일 해파랑길과 남해안 종주 트레일 남파랑길은 이미 연결이 됐으니까요. 아울러 대한민국 경계를 잇는 코리아둘레길 사업도 가시권에 들어옵니다. 현재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DMZ 평화의길 조성 사업이 진행 중입니다.

코리아둘레길의 원조라 할 수 있는 해파랑길 사업이 2010년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대한민국 외곽을 트레일로 연결하는 대역사를 지켜봤습니다. 지켜봤다기보다 함께했지요, 2010년부터 8년 가까이 문체부·한국관광공사와 걷기여행 공동 기획을 진행했으니까요. 코리아둘레길의 발단부터 진행 과정, 이색 코스와 추천 코스, 아쉬운 대목과 알려지지 않은 비화까지 코리아둘레길의 모든 걸 정리했습니다.

해안길의 시작 

해파랑길은 동해안을 따라 이어진 장거리 트레일이다.

해파랑길은 동해안을 따라 이어진 장거리 트레일이다.

코리아둘레길의 기원은 이명박 정부의 녹색 정책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 첫해인 2007년, 공교롭게도 제주올레 1코스가 개장했습니다. 이듬해엔 지리산둘레길도 첫 코스를 열었지요. 국내에도 걷기여행 붐이 불기 시작했던 시절, 관광 주무부처인 문체부도 트레일 사업에 착수했습니다.

문체부의 첫 트레일 사업은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 탐방로’이었습니다. 전국 기초단체 단위로 10㎞ 안팎의 트레일을 선정해 지원했었지요. 그때 영덕 블루로드, 강릉바우길, 소백산자락길 등이 문화생태 탐방로로 선정돼 지원을 받았습니다. 문화생태 탐방로 사업은 전국의 명품 트레일을 발굴하고 조성하는 데 역할을 했으나 결정적인 단점이 있었습니다. 기초단체 단위의 트레일이어서 길이가 짧았습니다. 문체부로선 걷기여행이라는 새 관광 트렌드에 걸맞은 장거리 트레일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필요에서 나온 트레일이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연결하는 ‘해파랑길’입니다. 아래 자료를 읽어보시지요.

2010년 9월 15일 해파랑길 조성 사업을 알리는 문체부 보도자료.

2010년 9월 15일 해파랑길 조성 사업을 알리는 문체부 보도자료.

해파랑길 사업을 알리는 2010년 9월 15일자 문체부 보도자료입니다(아직도 갖고 있었네요). 보도자료에서 알 수 있듯이 애초의 해파랑길은 40개 코스 688㎞ 길이로 계획되었습니다. 현재는 50개 코스 750㎞이지요. 2014년까지 조성한다는 계획은 다음과 같이 바뀌었습니다. 2012년 임시 개통, 2016년 5월 정식 개통. 이명박 정부에서 시작한 사업이 박근혜 정부 때 마무리되었습니다. 전체 예산은 170억원이었습니다.

적폐 논란

해파랑길 1코스인 부산 이기대 코스. 해파랑길 1코스는 해파랑길 50개 코스 중 가장 인기가 높은 코스다.

해파랑길 1코스인 부산 이기대 코스. 해파랑길 1코스는 해파랑길 50개 코스 중 가장 인기가 높은 코스다.

2016년 6월 17일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열린 ‘문화관광산업 경쟁력 강화회의’에서 코리아둘레길 계획을 발표합니다. ‘한국의 동·서·남해안 도로와 비무장지대 접경 지역을 연결하는 약 4500㎞ 길이의 걷기여행길인 코리아둘레길을 조성하겠다’고 처음 밝힌 것입니다. 당시 박근혜 정부는 관광에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관광을 주요 산업으로 판단하고 한 달이 멀다 하고 관광 정책을 쏟아냈습니다. 중국인 단체 관광객을 위해 학교 옆에도 호텔을 지을 수 있도록 법을 바꿔야 한다고 문체부가 부르짖던 시절입니다.

그맘때 나왔던 관광 정책 중 하나가 코리아둘레길입니다. 발표 한 달 전에 정식 개통한 해파랑길의 인기가 불을 지폈습니다. 정식 개통 전에도 해파랑길을 걷는 사람이 많았거든요. 당시 정부 생각은 단순했습니다. 동해안 종주 트레일이 인기가 좋으니 남해안 종주 트레일도 만들고 내친김에 대한민국 둘레길도 만들자. 대한민국 해안 둘레길을 조성한다고 하니 내륙 지역에서 반발하기도 했었지요. 충청북도의 반발이 제일 심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코리아둘레길은 2017년 1월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2019년까지 3년간 예산 90억원이 투입되었습니다.

코리아둘레길 지도. 지도 문체부

코리아둘레길 지도. 지도 문체부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에서 추진했던 주요 정책을 적폐라 규정했습니다. 바로 그때 적폐로 몰린 관광 정책이 코리아둘레길 사업입니다. 충분한 고민 없이 즉흥적으로 추진된 정책인 데다, 사업 기간과 예산 모두 해파랑길과 비교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당시 코리아둘레길을 담당했던 문체부 간부가 사업 폐기 의견을 내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사업은 살아남았습니다. 대북 관계 개선을 기대하는 문재인 정부가 DMZ 평화의길 사업을 호재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둘레길의 완성

코리아둘레길 4개 트레일의 CI와 기본 정보. 자료 문체부

코리아둘레길 4개 트레일의 CI와 기본 정보. 자료 문체부

2020년 10월 31일. 우여곡절 끝에 남파랑길이 개통했습니다.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전남 해남 땅끝마을까지 90개 코스 1470㎞ 길이의 트레일이 탄생했습니다. 2016년 해파랑길을 개통했을 때 국내 최장 거리 탐방로라 홍보했었는데, 남파랑길은 해파랑길의 두 배 가까이 됩니다.

2017∼2020년 남파랑길만 개통한 게 아닙니다. 서해안에서는 서해랑길 조성 사업이, 경기도와 강원도에서는 DMZ 평화의길 조성 사업이 동시에 진행됐습니다. 문체부가 11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서해랑길은 내년 3월에, DMZ 평화의길은 2023년 4월에 개통 예정입니다. 문재인 정부는 내심 코리아둘레길 사업을 임기 안에 마무리하고 싶었지요. 그러나 끝내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코리아둘레길은 이명박 정부에서 시작해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를 거쳐 다음 정부 때 완성되는, 이념과 정파를 뛰어넘어 네 개 정권이 차례로 추진한 유일무이한 관광 정책이 될 참입니다.

전남 해남 땅끝마을에 설치된 서해랑길 시작점 안내판.

전남 해남 땅끝마을에 설치된 서해랑길 시작점 안내판.

서해랑길에 이어 DMZ 평화의길까지 완성되면 코리아둘레길은 모두 285개 코스 4544㎞ 길이의 초장거리 트레일이 됩니다. 멕시코 국경부터 캐나다 국경까지 미국 서부 해안을 종주하는 PCT(Pacific Crest Trail)가 4286㎞입니다. 아마도 단일 국가 트레일 중 최장 거리 트레일일 겁니다. 코리아둘레길이 지나는 전국 기초단체는 모두 78개입니다.

어쩌다 코리아둘레길

해파랑길 2코스는 부산 영도를 가로지른다. 인증샷 명소로 떠오른 영도 해안 터널.

해파랑길 2코스는 부산 영도를 가로지른다. 인증샷 명소로 떠오른 영도 해안 터널.

앞서 설명했듯이 코리아둘레길은 애초부터 작정한 사업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해파랑길은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시작해 북으로 올라가지요. 남파랑길도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시작해 서쪽으로 이동합니다. 부산은, 원하지도 않았는데 졸지에 두 개 트레일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된 2023년을 상상해 봅시다. 코리아둘레길의 네 개 꼭짓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천 강화도 평화전망대(서해랑길 종점이자 DMZ 평화의길 시작점), 강화도 고성 통일전망대(DMZ 평화의길 종점이자 해파랑길 종점), 전남 해남 땅끝마을(남파랑길 종점이자 서해랑길 시작점), 그리고 부산. 대한민국 둘레길의 시작점이자 종점은 어디가 될까요? 현재로썬 부산이 제일 유력해 보이는데, 부산은 코리아둘레길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부산만 코리아둘레길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닙니다. 전국 자치단체 대부분이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 정부가 자치단체에 예산을 안 줍니다. 코스를 개장하면 코스 1개에 이정표 설치 명목으로 딱 한 번 1000만원 주는 게 전부입니다. 안내판 하나에 300만원 정도라는데, 이정표 몇 개 설치하면 끝이지요.

경남 남해 남해바래길 탐방센터에 있는 남파랑길과 남해바래길 이정표와 표식.

경남 남해 남해바래길 탐방센터에 있는 남파랑길과 남해바래길 이정표와 표식.

사실 정부에도 코리아둘레길 예산이 없습니다. 정부 예산에 코리아둘레길 계정이 없습니다. 2019년 이후 관광 당국은 걷기여행 활성화 사업 예산 중 일부를 코리아둘레길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올해의 경우 걷기여행 활성화 사업 예산 20억원 중 50∼60%를 코리아둘레길에 썼습니다. 기존의 길을 최대한 활용하고 토목공사는 지양한다는 취지는 이해합니다만, 코리아둘레길 사업이 차지하는 공간을 생각하면 턱없이 모자랍니다. 당장 길이 훼손되면 보강 공사를 해야 하는데 자치단체가 경비를 감당해야 합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 걷기여행 인구가 확 늘었다지만, 문재인 정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길에 관해선 영 인색하네요. 한국관광공사가 홍보 영상물 ‘필 더 리듬 오브 코리아’ 광고비로(제작비가 아닙니다) 101억4000만원을 쓴 걸 생각하면 차라리 허탈합니다.

길은 걷는 자의 것이다

남파랑길 37코스이자 남해바래길 4코스인 경남 남해 고사리밭길. 올해 처음 개방된 새 코스로 국내 최대 고사리밭을 가로지른다.

남파랑길 37코스이자 남해바래길 4코스인 경남 남해 고사리밭길. 올해 처음 개방된 새 코스로 국내 최대 고사리밭을 가로지른다.

정부의 무관심에도, 수많은 사람이 코리아둘레길을 걷습니다. 차도를 지나야 하는 구간도 많고 이정표가 불친절한 구간도 많은데 굳이 동해안과 남해안까지 찾아가 걷습니다. 이를테면 남파랑길 16코스 5.6㎞ 구간은 대형 차량이 통행하는 차도를 지나야 해서, 해파랑길 11코스 약 7㎞ 구간은 길가에 원자력발전소가 있어서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합니다. 해파랑길 마지막 구간인 50코스를 걸으려면 신분증이 있어야 합니다. 통일전망대가 있는 최전방 지역이어서 50코스 시작점에서 신분증을 확인합니다. 여러가지로 불편하고 위험한데도 참 많은 사람이 코리아둘레길을 걷습니다.

불편하고 때론 위험하기도 한 코리아둘레길을 왜 사람들이 걸을까요? 몇몇 구간은 정말 아름다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남파랑길 36∼46코스에 해당하는 남해바래길 구간을 추천합니다. 남해바래길은 기초단체 트레일의 모범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부의 예산 지원이 없어도 경남 남해군이 남해바래길을 핵심 관광 콘텐트로 집중 육성하고 있습니다. 안내 시설도 잘 돼 있고, 다양한 해설 프로그램도 운영 중입니다.

해파랑길 49코스인 강원도 고성 화진포 해변. 해파랑길 50개 코스 중 손에 꼽는 인기 구간이다.

해파랑길 49코스인 강원도 고성 화진포 해변. 해파랑길 50개 코스 중 손에 꼽는 인기 구간이다.

남파랑길 중에선 부산 영도를 가로지르는 2코스와 거제도 동남쪽 해안을 에두르는 21코스, 순천만 갈대밭을 관통하는 61코스, 해남 달마고도에서 땅끝마을까지 걷는 90코스를 추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해파랑길 중에선 부산 해운대를 관통하는 1코스와 영덕 블루로드의 하이라이트 구간인 21코스, 강릉바우길의 경포 구간인 39코스, 화진포 해변을 걷는 49코스가 인기 코스입니다.

남파랑길 완보 증명서. 남파랑길과 해파랑길 전체 코스를 다 걸으면 한국관광공사 사장 명의의 인증서를 받을 수 있다.

남파랑길 완보 증명서. 남파랑길과 해파랑길 전체 코스를 다 걸으면 한국관광공사 사장 명의의 인증서를 받을 수 있다.

길은 걷는 자의 것입니다. 코리아둘레길이 정치적 필요에 의해 시작되었어도, 또는 길의 의미가 정치 상황에 따라 훼손되었어도 내가 걸으면 내 길이 되는 것입니다. 굳이 전체 코스를 다 걸을 필요도 없습니다. 285개나 된다는 코스 중에서 나만의 코스 하나쯤 갖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사상 최대 관광 사업의 이면은 비록 추레합니다만, 장장 15년에 걸친 관광 사업이 길에 관한 것이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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