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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면 왜 천국이 가까이 오나…예수가 실제 쓴 아람어의 뜻 [백성호의 예수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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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호의 예수뎐]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버스를 타고 동쪽으로 갔다. 유대 광야에 위치한 여리고에는 시험 산이 있다. 그곳에서 예수는 40일간 금식하며 악마와 싸웠다고 한다. 시험 산 중턱의 가파른 절벽에는 1500년 전에 세운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원이 지금도 남아 있었다.

수도원 안에는 예수가 당시 머물렀다는 동굴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악마의 유혹을 받을 때 예수가 걸터앉았다는 조그만 바위도 있었다. 예수 사후에도 수도자들은 광야로 갔다. 예수가 만났던 악마를 그들도 만나기 위해서였다.

광야로 간 예수는 악마로부터 세 번의 유혹을 받는다. 예수는 내면의 욕망을 어떻게 물리치는지 몸소 보여주었다. [중앙포토]

광야로 간 예수는 악마로부터 세 번의 유혹을 받는다. 예수는 내면의 욕망을 어떻게 물리치는지 몸소 보여주었다. [중앙포토]

(32)회개하면 왜 천국이 가까이 오나

여리고에서 버스를 타고 사해(死海)로 갔다. 그리 멀지 않았다. 북쪽의 갈릴리 호수에서 강물이 흘러와 이스라엘 남쪽에서 고인 게 해수면보다 416m나 낮은 사해다. 사해 일대에서 세례 요한이 활동했다. 그는 메뚜기와 야생 꿀을 주로 먹고살았다. 요즘으로 치면 ‘생식과 자연식’이다.

복장도 특이했다. 낙타 털로 된 옷에 가죽띠를 둘렀다. 그는 오랜 세월을 광야에서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일부 신학자들은 세례 요한이 당시 광야에 있었던 수도 공동체의 일원이었을 것이라고 보며, 조상을 따라서 유목민으로 살았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사해는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다. 요르단 강물이 유입되지만 출구는 없다. 강물이 들어오기만 할 뿐, 나가지는 못 한다. 그만큼의 수량이 증발할 뿐이다. 염도가 높아 물고기도 살 수 없다. 성지를 순례하던 이들은 사해에 와서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소금 호수여서 물속에 가만히 있어도 몸이 뜬다.

이스라엘 사해 근처에는 유대 광야가 펼쳐져 있다. 오아시스 도시인 여리고도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다. [중앙포토]

이스라엘 사해 근처에는 유대 광야가 펼쳐져 있다. 오아시스 도시인 여리고도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다. [중앙포토]

어쩌면 ‘물 위를 걷는 예수’라는 초월적인 이야기가 사해에서 비롯됐을까. 아니면 예수가 몸소 물 위를 걸었을까. 어찌 됐든 몸이 물에 둥둥 뜨는 사해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신비의 호수였으리라.

예수도 나사렛을 떠나 세례 요한을 찾아왔고 실제로 그에게 세례도 받았다. 예수가 물에서 나올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왔다고 한다.(마태복음 3장 16절) 이 때문에 그리스도교에서 비둘기를 성령의 상징으로 쓴다. 나는 성경에서 “하늘이 열렸다”라는 구절에 눈길이 갔다. 그 대목을 안고 눈을 감았다. 그렇다. 하늘이 열려야 성령이 내려온다. 하늘이 열리지 않는다면 성령이 내려올 수가 없다. 그럼 어떻게 하면 하늘이 열리는 걸까. 왜 우리의 하늘은 열리지 않는 걸까.

세례 요한은 당시에 유명 인사였다. 그의 세례는 소문이 났고 인기를 끌었다. 그러자 형식적인 체험 차원에서 찾아오는 이들도 있었다. 천국이 가까이 온다고 하니 자기 속마음은 바꾸지 않은 채 세례만 받으려는 이들이었다.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뱀의 자식들!”이라고 쏘아붙였다. 과격한 발언이었다. 요한은 왜 그들을 “뱀의 자식들”이라고 했을까.

세례 요한이 에수에게 직접 세례를 하고 있다.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왔다고 한다. [중앙포토]

세례 요한이 에수에게 직접 세례를 하고 있다.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왔다고 한다. [중앙포토]

미국의 유진 피터슨 목사는 저서 『메시지』에서 요한의 말을 이렇게 풀었다. “너희의 뱀가죽에 물을 좀 묻힌다고 무엇이 달라질 것 같으냐? 바꿔야 할 것은 너희 겉가죽이 아니라 너희 삶이다!”(마태복음 3장 7~10절) 요한의 발언은 예수 당시뿐 아니라 요즘 시대까지 겨냥한다. 어쩌면 우리야말로 ‘뱀의 자식들’이다.  ‘천국행 티켓’을 얻으려고 교회에 가서 몸에 물만 묻히는 세례를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뱀의 허물을 벗으려면 말이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해주었던 요르단 강가로 갔다. 강폭이 그리 넓지는 않았다. 그가 형식적으로 세례를 받으려는 이들을 “뱀의 자식들!”이라고 부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담과 이브는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먹었다. 선악과는 ‘쪼갬’을 상징한다. 선악과를 먹고 나서 인간은 세상을 쪼개기 시작했다. 선과 악으로 쪼개고, 나와 너로 쪼개고, 이편과 저편으로 쪼개고, 자본가와 노동자로 쪼개고, 보수와 진보로 쪼갠다. 그렇게 세상을 쪼개는 눈을 가진 이들을 향해 세례 요한은 “뱀의 자식들!”이라고 윽박질렀다.

선악과(善惡果)는 원래 한 덩어리의 열매였다. 거기에는 쪼갬이 없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으면서 비로소 선과(善果)와 악과(惡果)로 쪼개졌다. 그때부터 인간은 세상을 둘로 나누기 시작했다. 좋은 것과 나쁜 것. 높은 것과 낮은 것, 선과 악, 자랑스러운 것과 부끄러운 것. 세상 모두를 그렇게 둘로 쪼갰다.

그때 하느님이 아담을 찾았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아담은 앞으로 나설 수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 성서에는 “부끄러움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기록돼 있다. 쪼갬의 결과이다. 그걸 안고선 ‘신의 속성’과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아담은 하느님 속으로, ‘신의 속성’ 속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하나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예수는 40일간 금식하며 기도를 했다. 예수 사후에도 수도자들은 앞다투어 광야로 갔다. [중앙포토]

광야에서 예수는 40일간 금식하며 기도를 했다. 예수 사후에도 수도자들은 앞다투어 광야로 갔다. [중앙포토]

예수도 갈릴리 호숫가에서 똑같이 말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복음 4장 17절) 요한이 세례를 주었다고 전해지는 장소에 섰다. 궁금했다. “회개하여라”의 뜻이 뭘까. . 그저 ‘잘못했다’고 뉘우치는 게 회개일까. 당시 예수의 직설은 무엇이었을까. 예수는 어째서 회개와 함께 하느님 나라가 온다고 했을까.

예수 당시 지중해 지역의 공용어는 그리스어였다. 신약성서는 그리스어로 처음 기록됐다. ‘회개하라’는 그리스어로 ‘메타노이아(metanoia)’다. 도올 김용옥은 그것을 ‘회심(回心)’이라고 번역했다. ‘마음의 방향을 튼다.’ 반면 예수가 실제 사용한 언어는 아람어였다. ‘메타노이아’에 해당하는 아람어는 ‘타브(tab)’다. ‘회복하다, 돌아오다’란 뜻이다. 그럼 무엇을 회복하는 것일까. 예수는 대체 어디로 돌아오라고 한 걸까.

수년 전이었다. 네팔에서 나이 지긋한 힌두교인을 만난 적이 있다. 그의 이마에 붉은 점이 하나 찍혀 있었다. 그게 뭐냐고 묻자 그는 “제3의 눈”이라고 답했다. 내가 “제3의 눈이 뭡니까?” 하고 다시 물으니 그는 “마음의 눈”이라고 답했다. 그랬다. 그들이 이마를 붉게 물들이며 그토록 간절히 구하는 건 ‘마음의 눈’이었다. 그게 누구의 마음일까. 지지고 볶는 ‘나의 마음’일까. 아니었다. 그건 ‘신의 마음’이었다. 그들이 구하는 ‘제3의 눈’은 다름 아닌 ‘신의 눈’이었다.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있는 예수를 그린 제임스 티소의 작품. [중앙포토]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있는 예수를 그린 제임스 티소의 작품. [중앙포토]

사람들은 묻는다. 그럼 ‘예수의 눈’은 어떤 눈인가.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이게 예수의 눈이다. 우리의 눈은 다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늘 불행해 보인다. 안타깝고 없어 보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채우려고만 한다. 하고 싶고, 되고 싶고, 가지고 싶은 무언가로 채우려 한다. 그렇게 마음이 ‘가짐’으로 가득한 부자가 될 때 행복하다고 여긴다. 그게 우리의 눈이다.

그런 우리를 향해 예수가 외친다. “마음의 눈을 돌려라. 하느님 나라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는 그렇게 역설한다. 결국 “회개하여라”는 ‘눈을 돌리라’는 뜻이다. 관점을 돌리라는 말이다. ‘나의 눈’에서 ‘신의 눈’으로 바꾸라는 의미다. 왜일까. 거기에 자유와 평화가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하느님 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의 최후는 참담했다. 당시 그의 영향력은 상당했고 추종자들도 많았다. 이 때문에 세례 요한을 ‘반체제 인사’로 분류하는 이들도 있다. 요한은 유대의 지배자를 향해서도 직설적인 비판을 쏟아냈다. 당시 유대의 왕은 헤롯 안티파스였다. 그는  이복 형제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했다. 요한은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수차례 지적했다. 헤롯은 결국 요한을 체포했다. 그러나 요한이 두려워 어쩌지를 못하고 있었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처참했다. 유대의 지배자를 향해서도 독설을 내뱉던 요한은 결국 목이 잘려서 죽었다. [중앙포토]

세례 요한의 죽음은 처참했다. 유대의 지배자를 향해서도 독설을 내뱉던 요한은 결국 목이 잘려서 죽었다. [중앙포토]

마침 헤롯의 생일잔치가 열렸다.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첫 남편의 딸)가 춤을 추자 다들 그 모습에 감탄했다. 헤롯은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마가복음 6장 22~23절)라고 말했다.

어머니에게 달려간 살로메가 돌아와 말했다.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마가복음 6장 25절) 헤롯 왕은 손님들 앞에서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았다. 결국 사형이 집행됐고, 쟁반에 담긴 세례 요한의 목이 살로메에게 전달됐다.

화가들은 살로메를 종종 ‘팜므 파탈의 상징’으로 쓴다. 아일랜드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희곡 『살로메』에서 세례 요한의 죽음을 변주했다. 살로메는 세례 요한에게서 키스를 거절당하자 그의 머리를 요구했다. 결국 살로메는 목이 잘린 요한의 머리를 움켜쥐고 그에게 키스를 한다.

구스타프 클림트도 〈유디트Ⅱ(살로메)〉라는 작품에서 ‘세례 요한의 죽음’을 다루었다. 가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살로메의 창백한 얼굴 밑으로 독기와 욕망이 고여 있다. 화려한 팔찌에 감긴 살로메의 손이 세례 요한의 머리를 틀어쥐고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 '유디트2(살로메)'. 살로메으 손에 세례 요한의 머리가 들려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 '유디트2(살로메)'. 살로메으 손에 세례 요한의 머리가 들려 있다.

요르단 강은 지금도 흐른다. 예수의 메시지도 마찬가지다. 2000년 세월을 관통하며 지금도 흐른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예수에게도 위협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를 가리켜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마가복음 6장 14절)라고도 했다. 헤롯 왕도 이 소문을 들었으니 예수에게 어떤 화가 닥칠지 모를 일이었다.

예수는 조용히 유대 광야를 떠났다. 그리고 고향인 갈릴리 지역으로 향했다. 버스도 광야를 떠났다. 예수가 태어난 나사렛, 그리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갈릴리 지역으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는 여전히 요르단 강이 흐르고 있었다. 세례 요한의 외침이 울렸다.

“마음의 눈을 돌려라. 하느님 나라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짧은 생각

오늘은 성탄절입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과 그 의미를 묵상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이번 ‘짧은 생각’에서는
종교의 겉과 속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종교에는 겉모습과 속모습이 있습니다.

겉모습은 외형적인 것입니다.
종교의 율법과 격식, 여러 가지 제도와 종교 조직 등을 말합니다.
겉모습이 존재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종교의 속모습을 지키고, 속모습을 찾아가기 위함입니다.

왜냐고요?
종교의 겉모습이 처음에 생겨난 이유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심장은 속모습입니다.
그런데 그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그런 속모습을 지키고 보호하고자 생겨난 게 겉모습입니다.

가령 가톨릭의 미사에는
여러 가지 절차와 상징과 비유가 있습니다.
그런 건 모두 종교의 겉모습입니다.
거기에 담긴 본질적 의미를 묵상하며
종교의 속모습에 더 가까이 다가서라는 뜻입니다.

개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을 지키며 교회에 출석하는 일을
종교적 의무의 전부로만 여기면 겉모습을 잡는 셈입니다.

그 대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하느님)이
왜 일곱 날째 쉬었는지 ‘안식’의 본질적 의미를
묵상하며 주일을 지킨다면 달라집니다.
우리는 종교의 속모습에 한 발짝 더 다가서는 겁니다.

영성가와 율법주의자는 본질적 차이가 있습니다.
영성가는 종교의 속모습을 찾아가고,
율법주의자는 종교의 겉모습에 집착합니다.

그럼 우리는 왜 종교의 겉모습이 아니라
종교의 속모습에 초점을 맞춰야 할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종교의 속모습을 통할 때 비로소 나의 속성이 신의 속성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닮아갈 때
‘나의 안목’이 무너지고, ‘신의 안목’이 드러납니다.

사도 바울은 그걸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
(갈라디아서 2장20절)

그래서 세례 요한의 외침은 의미심장합니다.

"마음의 눈을 돌려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제게는 이렇게 들립니다.

"종교의 겉모습이 아니라 속모습으로 눈을 돌려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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