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이스라엘판 계룡산’이었다, 예수가 만난 세 악마 정체 [백성호의 예수뎐]

중앙일보

입력 2021.12.1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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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호의 예수뎐]

버스를 타고 예루살렘을 떠나 동쪽으로 한 시간쯤 달리자 광야가 나타났다. 첫 인상은 ‘삭막함’이었다. 산성화한 언덕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생명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푸석푸석한 메마름과 절대적인 황량함만이 건조한 능선을 달리고 있었다. ‘아하, 여기가 광야구나. 예수께서 걸었던 광야가 이런 풍경이구나.’

그때 가이드가 흥미로운 설명을 던졌다. “요즘 이스라엘 젊은이들 사이에선 ‘광야 트래킹’이 유행입니다. 거친 자연에 도전장을 던지고, 자신의 한계를 체험하는 거죠.” 2000년 전에도 그랬을 것이다. 나를 무너뜨리는 곳, 거기서 드러나는 거대한 우주를 깨닫는 곳. 그곳이 ‘광야’라는 공간이었을 터이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버스를 타고 동쪽으로 달리면 유대 광야가 나온다. 순례객들이 수도공동체가 있었던 광야 일대를 돌아보고 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버스를 타고 동쪽으로 달리면 유대 광야가 나온다. 순례객들이 수도공동체가 있었던 광야 일대를 돌아보고 있다.

예수는 광야로 가서 40일간 금식하며 악마의 유혹을 물리쳤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수도자들도 광야로 가서 수도를 했다.

예수는 광야로 가서 40일간 금식하며 악마의 유혹을 물리쳤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수도자들도 광야로 가서 수도를 했다.

(31) 예수가 만난 광야의 악마는 삼지창 꼬리를 가졌을까

이스라엘의 사막은 달랐다. 바람이 만든 모래결과 굴곡진 지평선이 한 폭의 그림을 빚어내는 아라비아 사막과는 매우 달랐다. 그저 거칠고 단조로운 땅이었다. 광야에는 그런 단출함이 있었다.

예수가 태어나기 500년 전이었다. 인도의 붓다도 광야로 향했다. 그 광야는 사막이 아니었다. 보드가야의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고행림(苦行林)’이라 불리는 거대한 숲이었다. 당시 2만 명의 수행자가 그 숲에 살았다고 한다. 각자의 방식으로 수행과 고행을 하는 이들이었다.

상상해보면 굉장한 광경이다. 2만 명이나 되는 수행자들이 온 숲을 빼곡히 채웠을 터이다. 누구는 나무 아래서, 누구는 바위 위에서, 누구는 가부좌를 틀고, 또 누구는 가시방석 위에 누워서 온갖 수행법으로 자신을 무너뜨리려 애썼으리라. 요즘 눈으로 보면 거대한 ‘명상 타운’이다.

예수 당시에도 유대 광야에는 에세네파 등 수도공동체가 있었다. 당시의 유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예수 당시에도 유대 광야에는 에세네파 등 수도공동체가 있었다. 당시의 유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예수 당시에 유대 광야에 있었던 수도 공동체의 유적을 복원하면 이런 그림이 나온다.

예수 당시에 유대 광야에 있었던 수도 공동체의 유적을 복원하면 이런 그림이 나온다.

한국에도 그런 공간이 있다. 바로 계룡산이다. 옛날에도 그랬고 요즘에도 계룡산에는 온갖 도사와 수행자들이 들락거린다. 북한의 금강산도 한때는 계룡산과 같은 곳이었다. 절벽마다 골짜기마다, 일만 이천 봉우리마다 암자(수행처)가 빼곡하던 시절이 있었다. 율곡 이이도 한때는 입산해 금강산에서 도인(道人)을 찾아다닌 적이 있었다.

이스라엘의 ‘계룡산’은 바로 광야다. 예수 당시에는 유대 광야에 여러 수도 공동체가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거친 광야의 절벽과 동굴에서 살았다. 그중 하나가 쿰란 공동체다. 이 공동체에는 성서를 꿰뚫는 안목을 가진 ‘선생’도 있었다. 그들은 구약성서를 필사하고, 재산을 공유하고, 함께 식사하고, 함께 수도했으며, 오후 다섯 시가 되면 차가운 물에 몸을 씻었다고 한다. 일종의 세례였다.

버스가 그곳에 도착했다. 제주도 돌담길처럼 생긴 유적들이 곳곳에 보였다. 그 사이를 거닐며 공동체의 식당이 있었다는 장소 앞에 이르렀다. 2000년 전의 구도자들은 식탁에서 어떤 기도를 올렸을지 궁금했다. 어떤 간절함으로 자신의 삶을 통째로 걸고 이곳을 찾았을까. 건너편에는 높다란 모래 절벽과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동굴들이 보였다. 2000년 전에는 저 동굴마다 수도자들로 빼곡했을까.

예수에게 광야는 수도의 공간이자 사색의 공간이고, 기도의 공간이었다. 광야의 예수는 우리에게 묵상과 기도의 중요성을 일러준다.

예수에게 광야는 수도의 공간이자 사색의 공간이고, 기도의 공간이었다. 광야의 예수는 우리에게 묵상과 기도의 중요성을 일러준다.

광야를 걸었다. 메마른 땅이었다. 성서에는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갔다”라고 기록돼 있다. 광야는 그리스어로 ‘에레모스(eremos)’다. ‘에레모스’는 ‘빈 곳’이라는 뜻도 있다. 그리스도교 영성가 다석 유영모가 말한 “없이 계신 하느님”도 ‘빈 곳’이다. 빈 채로 비어 있는 게 아니라 빈 채로 차 있다. 물리학자들은 이 우주도 그렇다고 말한다. ‘0’으로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0’으로 가득 찬 것이라고.

그러니 광야는 물리적 공간만 뜻하는 게 아니다. ‘나’라는 에고를 비울 때 드러나는 우주 이전의 우주다. 그런 태초의 공간이다.

나는 광야에 섰다. 저 멀리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바람을 등지고 눈을 감았다.

우리의 광야는 어디일까. 고단한 나의 하루, 지지고 볶는 나의 일상. 그게 바로 ‘광야’가 아닐까. 내 안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악마’가 올라온다. 빵을 쌓고, 명예를 쌓고, 권력을 쌓으라는 유혹이 때로는 살가운 바람처럼, 때로는 집채만 한 파도처럼 넘실댄다. 예수는 그 유혹 앞에서 ‘나’를 빼버렸다. 유혹의 씨앗이 자랄 수 없도록 ‘에고’라는 밭을 아예 쏙 빼버렸다. 그리고 외쳤다. “하느님, 그분만을 섬겨라.” 그러자 ‘악마’는 물러갔다고 한다.(마태복음 4장 11절)

제임스 티소의 작품. 광야에서 수도하는 예수에게 빵과 권력과 명예의 유혹이 날아온다. 예수는 그 모든 유혹을 물리쳤다.

제임스 티소의 작품. 광야에서 수도하는 예수에게 빵과 권력과 명예의 유혹이 날아온다. 예수는 그 모든 유혹을 물리쳤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마음으로 거머쥐는 것. 불교에서는 그 모두를 ‘색(色, 형상)’이라고 부른다. 지지고 볶는 우리 안의 온갖 감정이 모두 형상이다. 우리는 그것이 ‘있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거머쥔다. 그것이 집착이다. 붓다는 “있는 게 아니야. 그건 없는 거야. 있는 것이 없는 것(色卽是空)이다”라고 했는데, 우리는 “아니야. 이건 진짜 있는 거야. 있는 것이 있는 것(色卽是色)이다”라고 받아친다. 그래서 ‘빈 곳(空)’이 드러나질 않는다. ‘없이 계신 하느님’이 드러나질 않는다.

예수는 악마를 세 차례나 무너뜨렸다. 악마는 ‘내 안의 욕망’이다. 왜 그랬을까. 그게 ‘빈 곳’을 가리기 때문이다. 그걸 무너뜨려야 ‘빈 곳’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없이 계신 하느님’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드러나면 알게 된다. 모든 색 속에 이미 ‘빈 곳’이 있음을 말이다. 모든 형상 속에 이미 하느님이 계심을 말이다.

짧은 생각
광야의 예수는
우리에게 많은 걸 일러줍니다.

예수가 만난 세 악마의 정체가 뭘까요.

정말 삼지창처럼 생긴 꼬리와
박쥐처럼 생긴 날개를 달고서
짐승처럼 날아다니는 악마일까요.

그런 악마가 광야에 살고 있는 걸까요.

만약 그렇다면
광야는 피해야 할 장소입니다.
우리가 굳이 광야로 가서
삼지창 꼬리의 악마와 마주칠 필요는 없으니까요.

다시 묵상해 봅니다.
우리는 왜 광야로 가야 하는 걸까.

답은 뚜렷합니다.
악마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삼지창 꼬리를 가진 악마가 아닙니다.
짐승처럼 날아다니는 그런 악마가 아닙니다.
그럼 뭘까요?

광야의 예수는 우리에게
그 답을 일러줍니다.

다름 아닌 ‘내 안의 악마’입니다.
내 안의 욕망입니다.
그게 바로 악마입니다.

왜냐고요?
그 악마가 ‘나의 뜻’을 키우기 때문입니다.
그 욕망으로 인해 우리의 기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가 아니라,
“아버지 뜻대로 마시고 제 뜻대로 하소서”라고 자꾸만 기도하게 됩니다.

그렇게 악마는 가로막습니다.

나와 하느님,
나와 하늘,
나와 진리,
나와 그리스도 사이에 장벽을 세웁니다.

예수님은 그걸 어떻게 허무는지
우리에게 일러주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으로 말입니다.

“하느님, 그분만을 섬겨라.”
이 말과 함께 광야의 악마가 사라집니다.
욕망의 씨앗이 자라날 텃밭을 빼버렸으니까요.

그럼 하느님, 그분만을 섬기는 게 뭘까요.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 헌금을 하고,
교회에서 봉사 활동을 하는 게
하느님 그분만을 섬기는 걸까요.
그렇게 충성을 다하는 게
하느님 그분만을 섬기는 걸까요.

예수님은 왜 “하느님, 그분만을 섬기라”고 말한 걸까요.

답은 따로 있습니다.
나를 섬기지 말고, 하느님을 섬기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내 뜻을 따르지 말고, 하느님 뜻을 따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말고
하느님 뜻이 무엇인지 물으라는 말입니다.

하느님 뜻을 알고
하느님 뜻을 따르는 사이에
내 안의 악마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걸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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