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 비가 와도 유대인은 왜 우산을 펴지 않나 [백성호의 예수뎐]

중앙일보

입력 2021.11.2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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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예수뎐]  

“혹시 안식일에 운전할 일이 있으면 조심하세요.”

예루살렘에서 만난 유대인이 내게 경고해주었다. 정통파 유대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 갈 일이 있다면 반드시 명심하라고 했다.

정통파 유대인들이 사는 마을은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에서 그리 멀지 않다.

정통파 유대인들이 사는 마을은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에서 그리 멀지 않다.

“자칫하면 돌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안식일에 운전하는 걸 못마땅해 할 수도 있거든요.”
“그럼 유대인은 안식일에 운전을 하지 않습니까?”
“안 합니다. 운전도 일이거든요. 유대인은 안식일에는 절대 일을 하지 않아요.”
“그럼 밥도 안 해먹나요?”
“성경에는 ‘안식일에는 너희가 사는 곳 어디에서도 불을 피워서는 안 된다’(출애굽기 35장 3절)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음식은 하루 전에 이튿날 음식까지 미리 장만해두지요. 안식일에는 요리를 하지 않고 먹기만 합니다. 안식일에는 비가 와도 우산을 펴지 않고요.”
“그럼 흠뻑 젖나요? 왜 그러는 거죠?”
“안식일에는 천막을 치는 일이 금지돼 있거든요. 그래서 우산도 펴지 않지요.”

(28) 안식일에 비가 와도 유대인은 왜 우산을 펴지 않나.

유대 민족은 오랜 세월 동안 떠돌아다닌 유목민이었다. 소 떼와 양 떼를 몰며 목초지를 찾아 이동하며 늘 천막을 쳤다. 새로 천막을 치고, 다시 천막을 걷는 일은 그들에게 집을 짓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일상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통곡의 벽 앞에서 유대인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위 사진은 그들이 기도할 때 읽는 경전이다.

통곡의 벽 앞에서 유대인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위 사진은 그들이 기도할 때 읽는 경전이다.

“한국 사람은 주말에 여행을 갑니다. 안식일은 일종의 주말인데, 안식일에 운전을 하지 못하면 유대인은 주말여행도 가지 않나요?”
“안식일에는 여행을 가지 않아요. 다들 집에 머물면서 쉬지요. 여행은 안식일에 가지 않고, 주로 여름휴가 때 갑니다.”
“만약 안식일에 차를 몰고 유대인 마을에 가면 어찌 됩니까?”
“돌을 던지는 유대인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 마을 아파트에는 안식일에 주차장 출입구를 아예 봉쇄하는 곳도 있지요. 운전을 할 수 없도록 말이에요. 안식일에는 전기 스위치도 켜지 않아요. ‘불을 피우지 말라’라는 안식일 규정 때문이죠. 가스레인지의 불도 켜지 않고, 냉장고 문도 열지 않습니다. 엘리베이터 버튼도 안식일에는 자동으로 층마다 섭니다. 타고 내리는 사람이 없더라도요.”
“왜 그렇게 안식일을 지키는 걸 중시합니까?”
“성서에 ‘안식일을 지키라’라고 돼 있으니까요. 그것이 유대인이 하느님과 맺은 언약이기 때문이지요.”

예루살렘 성의 북문으로 팔레스타인과 유대인들이 출입하고 있다. 총을 든 이스라엘 군인들이 주위를 경계하고 있다.

예루살렘 성의 북문으로 팔레스타인과 유대인들이 출입하고 있다. 총을 든 이스라엘 군인들이 주위를 경계하고 있다.

유대교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 질 녘부터 토요일 해 질 녘까지다. 그때는 귀밑머리를 감아서 길게 늘어뜨리고 검정 모자를 쓴 정통파 유대교인들이 오가는 모습을 예루살렘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구시가지의 ‘통곡의 벽’까지 걸어가서 기도하는 정통파 유대교인들도 꽤 있었다. 안식일에도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는 건 괜찮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나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들의 안식일은 다르다. 이슬람교는 금요일이 안식일이다. 예루살렘에서도 무슬림들은 금요일에 가게 문을 닫았다. 그리스도교의 안식일은 일요일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에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세 종교가 있고, 서로 다른 요일의 세 안식일이 있었다.

나는 정통파 유대인들이 사는 마을을 찾아갔다. 예루살렘 구시가지에 있는 ‘통곡의 벽’에서 걸어서 15~20분 거리였다. 그 지역에는 온통 긴 수염에 검정 코트를 입은 정통파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여성들도 검정 치마에, 머리에 수건을 두른 전통 복장을 하고 있었다.

유대의 전통적인 교육 방식을 고수하는 정식 학교도 있었다. 아무리 봐도 옛날식으로 사는 사람들로만 보였다. 미국의 개척 시대를 담은 텔레비전 드라마 ‘초원의 집’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거기서 만난 유대인에게 물었다.

통곡의 벽에 난 작은 틈마다 유대인들이 끼워넣은 기도문 종이가 있다. 그들에게 통곡의 벽은 성지 중의 성지다.

통곡의 벽에 난 작은 틈마다 유대인들이 끼워넣은 기도문 종이가 있다. 그들에게 통곡의 벽은 성지 중의 성지다.

“이스라엘은 날씨도 더운데 저렇게 수염을 기르면 더 덥지 않습니까? 현대 사회의 트렌드와도 전혀 맞지 않아 보이네요. 죄송한 말이지만 너무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는군요.”

그 유대인은 오히려 내게 반문했다.

“요즘 사람들이 따르는 유행이란 것이 영원히 가는 건가요 아니면 곧 바뀌는 건가요?”
“곧 바뀌는 거죠. 갈수록 바뀌는 시간도 빨라지고요.”
“그럼 ‘현대적’이라는 미적 기준도 영원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일시적인 기준이고, 곧 바뀌는 기준이지 않나요? 우리는 그러한 미적 기준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굳이 따르고 싶지도 않고요.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영원한 걸 추구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미적 기준이지요.”

안식일에 대한 그들의 기준과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그러니 2000년 전에는 어땠을까. 예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을 지키는 게 가장 중요한 율법 가운데 하나였다. 실제 십계명 중에서도 ‘의례’에 대한 규정은 ‘안식일을 지켜라’가 유일하다. 십계명은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계명으로 유대인들에게는 ‘절대적인 지침’이었다.

예수는 유대 사회가 목숨처럼 여기던 안식일에 대한 율법에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선언을 했다. 결국 그런 이유들로 인해 십자가 처형에 처해지게 됐다.

예수는 유대 사회가 목숨처럼 여기던 안식일에 대한 율법에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선언을 했다. 결국 그런 이유들로 인해 십자가 처형에 처해지게 됐다.

예수는 그 계명을 어겼다. 당시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그랬다.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한 결정적 이유 중 하나다. 구약을 믿는 유대인들은 하느님과 약속을 했다. 신이 주신 율법을 유대인이 지키면, 신은 유대인에게 구원을 주는 약속이다. 성스러운 약속, 그래서 그걸 ‘성약’이라고 부른다.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키는 건 결국 구원에 대한 문제다. 구원을 받느냐, 구원을 받지 못하느냐. 그게 안식일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에 달렸기 때문이다. 더구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는 십계명 중에서도 아주 무게감 있는 계명이다.

예수는 그걸 건드렸다. 유대인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율법의 안식일’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물었다. 하느님이 안식일을 준 이유가 뭔가. 무엇이 진정한 안식인가. 안식일은 과연 누구를 위해서 있는 건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인가. 그렇게 안식의 본질적 의미를 물었다.

고대 유대 사회에서 안식일을 어긴 이는 사형에 처해졌다. 그러니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던 예수의 당시 발언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고대 유대 사회에서 안식일을 어긴 이는 사형에 처해졌다. 그러니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던 예수의 당시 발언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그 물음은 도발적이었다. 철저한 율법주의 사회였던 이스라엘에서 예수가 던진 물음은 혁명적이었다. 유대인들의 눈에는 그랬다. 살려두기에는 위험했다. 너무도 체제 전복적인 발언이었다. 실제 유대인들이 믿는 구약성경에는 “안식일을 어긴 자는 사형에 처한다”(탈출기 35장 2절)고 돼 있다.

예수도 그걸 알았을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선언한 순간, 자신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한 죽음의 그림자를 말이다. 이후에도 예수의 발언과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하게 안식일을 때렸다. 안식일에 대한 유대인의 도식적 믿음을 가격했다. 그리고 진정한 쉼, 안식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던졌다. 그 물음 앞에서 유대 사회는 당황했다.

〈29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토요일 연재〉

짧은 생각
종교가 생겨난 까닭은 ‘문제’입니다.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교가 생겨났습니다.

종교의 창시자들도 그랬습니다.
인간이 가지는 본질적 한계,
그에 따른 온갖 문제들.
그걸 해결하기 위해 솔루션(해법)을 제시했습니다.

그 솔루션을 보며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전에는 아무도 내놓지 않았던 문제 해결법입니다.
그 솔루션으로 인해 자신들의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합니다.
이 솔루션은 정말 소중한 거구나.
이게 변질되거나, 왜곡되거나, 없어져선 안되겠구나.
이게 사라지지 않도록, 이게 영원하도록 지켜야겠구나.

그걸 위해 사람들이 모이고, 조직이 생기고, 규칙이 생겨났습니다.
거의 모든 종교가 이 과정을 거쳤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규칙이 점점 단단해집니다.
규칙이 도식화하고, 절대화하고, 사람들은 그 규칙에 권위를 얹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규칙은 시간이 흐를수록 강고한 율법이 됩니다.

종교의 영성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반면 율법은 눈에 보입니다. 손에도 잡힙니다.

그래서 쉽습니다.
내가 거머쥐기에 훨씬 더 쉽습니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영성 대신 율법을 틀어쥐기 시작합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신앙이 좋은 사람”이란 등식을 갖기 시작합니다.
거기에 집착하며 생겨난 게 ‘율법주의’입니다.

2000년 전의 유대 사회만 그런 게 아닙니다.
2000년이 흐른 지금의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종교의 심장은 영성입니다.
그걸 찾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일종의 도구가 율법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주객이 전도된 풍경을 종종 목격합니다.
종교의 온갖 규칙과 제도와 율법을
영성보다 중시하는 사람들.

예수님은 그런 우리에게 지금도 묻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한 건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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