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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선 긋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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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정진호 기자 중앙일보 기자
정진호 경제정책팀 기자

정진호 경제정책팀 기자

오랜 친구 A(30)는 9월에 큰 수술을 받았다. 8시간 심장을 멈추고 수술을 받은 탓에 심폐기능이 떨어져 백신 접종은 포기했다. A는 수술 전 누구보다 빨리 얀센 백신을 접종했는데 부스터샷은 맞지 못해 미접종자 신분이 됐다. “백신패스 때문에 불편하겠다”고 걱정하자 “그보다는 백신을 안 맞았다고 비난하는 시선이 서운하다”고 대답했다. A는 수술 이후 밖에선 밥을 먹지 않는 등 자발적 거리두기에 누구보다 착실하다. 그러나 확진자가 급증하자 일부 접종자는 A를 원망한다.

12일 기준 접종 완료율은 81.2%다. 81%와 19%로 갈라진 싸움에 김부겸 국무총리가 불을 지폈다. 지난주 간담회에서 “정부 독려에도 한 번도 접종을 안 한 분이 800만~900만 명이다. 이런 분들이 있는 한 싸움은 안 끝난다”고 하면서다. 코로나19와의 싸움은 언제부턴가 접종자와 미접종자 사이의 것으로 바뀌었다. 갈등이 커지면서 온라인상엔 “접종자도 어차피 다 자기 코로나 안 걸리려고 맞은 게 아니냐. 왜 백신패스 혜택을 주냐”는 미접종자의 날 선 말까지 난무한다.

서울 강북구의 도서관에 방역패스 안내문이 붙어 있다. [뉴스1]

서울 강북구의 도서관에 방역패스 안내문이 붙어 있다. [뉴스1]

요즘 우리 사회에 선이 자주, 뻔뻔하게 그어진다. 2%와 98%로 갈라진 종합부동산세 논란도 마찬가지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국민 98%는 종부세와 관계없다”고 말했다.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도 “우리나라 98%는 종부세 해당 없다. 고지서를 받아보지 못한다”고 하는 등 비슷한 말을 쏟아냈다.

갓난아기까지 모두 포함하고 계산해 2%라는 것이나 주택 보유자 중에서 따지면 2%가 훌쩍 넘는다는 사실은 나중 문제다. 이미 ‘2%’는 낙인이 됐다. “제네시스 G70 자동차세 약 50만원, 시가 25억 이하 1주택자 종부세 50만원이 폭탄?”(조국 전 법무부 장관), “소나타 2000㏄ 자동차세가 52만원”(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 같은 말이 더해졌다. 쉽게 말해 자동차세와 비슷한 수준이니 ‘징징대지 말라’는 것이다. “2%는 국민 아니냐”는 울분엔 이유가 있다.

88%와 12%로 나눠진 재난지원금부터 성별과 세대 사이까지 선이 그어진다. 여야 가릴 것 없이 대선후보들이 쏟아낸 ‘이대남’을 향한 구애의 언어는 남성과 여성 사이 선을 두껍게 칠했다. 청년층의 표심이 중요하다는 판단에서인지 정치권의 표현을 들으면 20대와 40대 사이에도 선이 그어진 듯하다.

긴즈버그 미국 전 대법관은 『긴즈버그의 말』에서 ‘에 플루리부스 우눔’을 미국의 정신이라 말한다. 미 동전에 새겨진 라틴어로 ‘여럿이 모여 하나’라는 뜻인데 그는 이를 “다름을 용인하고, 더 나아가 인정하면서 끝까지 힘을 합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나라엔 지나친 기대일까. 대선을 앞둔 지금, 칸막이를 지우는 위정자들의 ‘굵고 큰 선’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