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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굳이 나를 택한 그대여, 가만히 바라봐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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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박혜은의 님과 남(106)

얼마 전 냉장고에 쌓인 묵은 반찬들을 없애리라 마음먹고는 요즘 말하는 냉털(냉장고 털이)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먹다 남아 얼려 두었던 전을 해치우게 된 저녁이었죠. 남아 있던 것이다 보니 종류가 제각각이었는데 버섯전, 동태전, 그중에 남편과 제가 둘 다 좋아하는 두부 부침은 아쉽게도 달랑 하나만 남아있었습니다. 약한 불에 잘 데워 상에 올리니 묵은 반찬치고는 그래도 꽤 괜찮아 보입니다.

앞으론 딱 먹을 만큼만 사고 쌓아두지 말자며 이 얘기 저 얘기 주고받으며 식사를 하다 보니 전을 담아둔 그릇에 두부 부침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하나 있는 두부 부침을 남편이 아무 생각 없이 냉큼 먹어버린 겁니다. 저 역시 좋아하는 음식이니 더 눈이 간 것이죠.

사실 남편은 두부 부침이 하나였는지 둘이었는지 기억 못 했겠지만 나라면 먼저 묻거나 혹은 반을 나누어 올려 주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맘을 살짝 비추니 아니나 다를까 남편은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죠. 왜 혼자만 먹었느냐는 내용의 나의 질문은 그게 하나만 있었냐는 대답으로 돌아옵니다.

글로 적다 보니 그저 피식 웃고 넘어갈 흔한 일상입니다. 하지만 그날 제가 다른 날보다 더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다면 그 서운함이 두부 부침에 전가되어 표현되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혹은 남편의 하루가 그러했다면 웃자고 던진 제 말이 돌처럼 여겨져 날카로운 화살로 돌아왔을 수 있었을 겁니다.

때로 밖에서 쌓인 여러 감정이 집으로 돌아온 순간 아내나 남편의 말 한마디에 발화 되어 큰불이 되기도 합니다. 난데없이 날벼락을 맞는 상대 역시 기분이 좋을 리 없겠죠.

사람마다 상황을 바라보는 판단의 기준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나와 같지 않다고 해서 틀린 것이라 말할 수 없음을 잘 알면서도 가까운 사이에서 자꾸만 깜빡한다. [사진 pxhere]

사람마다 상황을 바라보는 판단의 기준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나와 같지 않다고 해서 틀린 것이라 말할 수 없음을 잘 알면서도 가까운 사이에서 자꾸만 깜빡한다. [사진 pxhere]

살다 보면 특히 가까운 사이에서 ‘설마 모를까’ 하는 마음과 ‘어떻게 모를 수 있어’ 하는 마음이 수없이 오고 갑니다. 대게 그 마음 앞에는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설마’와 ‘어떻게’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나의 마음에 기인합니다.

대부분 갈등은 사람 자체가 아닌 상황을 바라보는 착각과 오해에서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이 문제가 아닌데 사람이 문제인 것으로 생각하면 해결책을 찾기 힘이 듭니다. 해결책보다는 원망으로 향하게 되죠.

남편은 그 날 식탁 위 두부 부침이 하나였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을 뿐인데, 상황에 대한 사실 확인 없이 당신은 매사에 너밖에 모른다는 말로 확대되면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가 납니다. 사람마다 상황을 바라보는 판단의 기준은 다를 수밖에 없죠. 나와 같지 않다고 해서 틀린 것이라 말할 수 없음을 잘 알면서도 가까운 사이에서 자꾸만 깜빡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이’ , ‘설마, 어떻게 모를 수 있어’ 하는 나만의 생각과 함께 말입니다.

결혼 생활을 하며 와 닿는 노래가 있습니다. ‘오르막길’이란 제목의 정인과 윤종신이 부르는 노래 가사를 일부 소개해 봅니다.

이제부터 웃음이 사라질거야 가파른 이 길을 좀 봐 그래 오르기 전에 미소를 기억해 두자 오랫동안 못 볼지 몰라
완만했던 우리가 지나온 길에 달콤한 사랑의 향기 이제 끈적이는 땀 거칠게 내쉬는 숨이 우리 유일한 대화일 지 몰라
한 걸음 이제 한걸음일 뿐 아득한 저 끝은 보지마 평온했던 길처럼 계속 나를 바라봐줘 그러면 견디겠어
사랑해 이 길 함께 하는 그대 굳이 고된 나를 택한 그대여~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즈음의 누군가가 듣는 가사라면 무척이나 건조해 보입니다만 결혼생활을 이어가며 어느 날인가는 그렇지 하며 공감하게 되는 순간이 옵니다.

노래를 들으며 생각합니다. 내가 ‘선택’한 그 사람을 ‘가만히 바라봐주는 것’은 부부 사이에 꼭 필요한 한가지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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