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승 공정위장 발언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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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승(사진) 공정거래위원장은 8일 "대기업 집단은 성공하면 총수의 것이고, 실패하면 국가가 공적자금을 댄다"며 "따라서 대기업 집단은 공적 성격이 있다"고 말했다. 권 위원장은 이어 "삼성.현대차.SK그룹 등은 소유는 개인에게 있지만 국민의 기업이다"고 주장했다. 이날 오전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국가경영전략연구원 주최로 열린 강연에서 권 위원장이 한 말이다.

권 위원장은 또 "이들이(삼성.현대차.SK그룹 등) 공공적인 성격을 가졌는데도 고리처럼 이어지는 환상형 순환출자로 시장에 피해를 주는 만큼 규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정위원장이 이처럼 시장경제의 기본인 사유 재산권을 건드리는 내용의 발언을 하자 기업인 등이 모인 방청석에서 즉각 비판이 터져 나왔다. 한 참석자는 "대기업이 국민의 기업인지는 국민이 판단할 문제"라며 "대기업 규제와 관련해 공정위가 출발부터 잘못 생각하는 것은 아니냐"고 따졌다.

그러자 권 위원장은 "대기업 집단이 오로지 사적 기업의 성격만 있는 게 아니고 이들 기업이 국민적 관심사라는 얘기"라고 한발 물러섰다. 그러면서도 그는 "대기업의 성패가 국민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이들 때문에 시장기능이 제대로 작동을 안 하니 공정위가 바로잡을 임무가 있다"며 '규제론'을 강조했다.

이 같은 권 위원장의 발언에 대해 삼성.현대차.SK 그룹은 공식 논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속앓이를 하는 모습이다. 기업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공정위원장이 이런 인식을 갖고 있다면 앞으로 어떤 정책이 나올지 모른다는 우려에서다. 한국경제연구원 배상근 박사는 "사유재산권 원리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시장경제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재정경제부가 '기업에 더 이상 부담을 주지 않겠다'고 하는데도 공정위만 주도권 행사 차원에서인지 부적절한 목소리를 계속 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권 위원장은 이날 언론에 대한 불만도 직설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공정경쟁을 확산시키려면 언론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야 하는데 신문시장 규제 때문에 공정위가 언론으로부터 받아야 할 것을 못 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언론이 시장기능 제고를 고민하는 (공정위의) 충심을 모르고 가십 위주로 다룬다"고 말했다.

권 위원장은 또 출자총액제도 개편안을 공개했다. 새로운 환상형 순환출자를 금지하면서 적용 대상을 자산 2조원 이상 기업집단으로 확대하겠다는 내용이다. 현재 출총제는 자산 6조원 이상 기업집단에 적용되는데 순환출자 규제 대상은 더 많아진 것이다.

또 출총제를 유지하되 기업집단이 아니라 자산 규모가 일정 기준 이상인 개별 기업에 대해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권 위원장은 "현재 (14개 기업집단의) 340여 개 기업이 출총제 적용을 받는 것에 비해 (출총제 적용 대상 기업의) 숫자가 20~30개로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에서는 자산 10조원 이상 기업집단에 속해 있는 기업 중 자산 2조원 이상 기업만 출총제 적용 대상으로 할 경우 삼성그룹 내 8개 계열사 등 7개 그룹의 29개 기업이 여기에 해당할 것으로 분석했다.

이 같은 공정위 개편안에 대해 재계는 물론 재경부 등 다른 경제부처까지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출총제는 유지하면서 순환출자 금지만 추가로 등장하는 '이중 족쇄'라는 반발이다. 조건호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은 "재계는 출총제를 두고 흥정을 하자는 것이 아닌데 이렇게 되면 혹 떼려다 혹 붙이는 격"이라며 "조건 없이 출총제를 폐지하라"고 주장했다.

한편 뉴라이트 계열 시민단체인 바른사회시민회의(공동대표 노부호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날 오전 서울 정동 세실레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권오승 위원장의 사퇴와 순환출자 금지제도의 도입 중단을 촉구했다.

김준술.천인성 기자

◆ 권오승 공정위원장=국내 공정거래법의 권위자로 올 3월 공정위원장에 임명되기 전 서울대 법대에서 경쟁법을 강의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에 딸의 결혼식 주례를 맡았다. 노 대통령의 사위가 서울대 법대 대학원 시절 권 위원장의 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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