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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서 몰라요? 그럼 기억해요, 10년은 물리게 듣게 될테니[뉴스원샷]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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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 레저팀장의 픽 - 바둑기사 신진서

한국 랭킹 1위 신진서 9단. 올겨울이 끝나기 전, 신진서 9단이 세계 바둑 패권을 차지할 것이라고 바둑계는 입을 모은다. 사진 한국기원

한국 랭킹 1위 신진서 9단. 올겨울이 끝나기 전, 신진서 9단이 세계 바둑 패권을 차지할 것이라고 바둑계는 입을 모은다. 사진 한국기원

바둑 좋아하시나요? 조훈현은 아시지요? 국회의원도 했는데…. 이창호는요? 중국에서 신처럼 떠받드는 한국 기사입니다. 이세돌은 아시겠지요. 그 유명한 알파고와 붙었던 인간계 대표였잖아요. 혹시 신진서는 아시나요? 처음 들어보셨다고요? 저런, 그럼 외우세요. 앞으로 못해도 10년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을 이름입니다. 신진서는 현재 인공지능과 가장 가까운 바둑을 둔다는 기사입니다. 언론이 애용하는 그의 별명은 ‘신공지능’입니다. 신진서의 기력이 인공지능과 인간계 중간쯤이어서 ‘중간계 기사’라고도 한다지요.

여느 초일류 기사처럼 신진서도 천재입니다. 천재는 늘 수많은 이야기를 동반하지요. 신진서도 그렇습니다. 바둑을 몰라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습니다. 무엇보다 신진서는 2000년생입니다. 밀레니엄 키드이지요. 올겨울이 끝날 즈음이면 전 세계 바둑계는 이 밀레니엄 키드의 세상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신진서의 위대한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습니다.

왕좌를 물려받다

22개월째 한국 랭킹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신진서 9단. 사진 한국기원

22개월째 한국 랭킹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신진서 9단. 사진 한국기원

88.37%. 지난해 신진서 9단의 승률입니다. 공식 대국 86번 중에서 76번 이겼고 10번 졌습니다. 사상 최초로 승률 90%를 돌파하나 했었는데, 아쉽게 못 미쳤지요. 1년 내내 90%를 넘던 승률이 연말 하루에 두 판을 내리 지면서 80%대로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승률 88.37%는 가공할 기록입니다. 무려 32년 전 기록을 갈아치웠거든요. 이전 기록은 이창호 9단이 1988년 세웠던 88.24%였습니다.

10월 현재 한국 랭킹 1위 기사도 신진서입니다. 2020년 1월 1위에 오른 뒤 22개월 연속 1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올해는 승률이 조금 떨어져 81.81%(63승 14패, 10월 23일 기준)입니다. 그래도 다승 1위고, 승률 1위입니다. 국내 대회 전관왕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신진서는 현재 GS칼텍스배, 쏘팔코사놀 최고기사 결정전, KBS바둑왕전, 용성전, 명인전 타이틀 홀더입니다. 국내 기전 5관왕이지요. 현재 본선이 진행 중인 우슬봉조 한국기원 선수권전까지 우승하면 전관왕에 오릅니다.

신진서는 한국 바둑 일인자의 계보를 잇는 절대 강자입니다. 바둑계에선 조남철-김인-조훈현-이창호-이세돌-박정환으로 이어지는 왕좌를 신진서가 물려받았다고 입을 모읍니다. 특히 여전히 세계 초일류 기사로 통하는 박정환 9단을 딛고 일어섰다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이전에는 보통 세대교체를 통해 지존의 자리를 대물림했거든요.

박정환은 신진서에게 천적으로 통했었습니다. 2019년 전까지 신진서와 박정환의 상대전적은 2승 10패였습니다. ‘신진서가 아직은 박정환에게 안 된다’는 얘기가 파다했었지요. 2020년 극적인 반전이 일어납니다. 상대전적 14승 2패. 분수령이 된 승부가 있었습니다. 2020년 10월부터 12월까지 열린 신진서 대 박정환의 ‘슈퍼 7번기’. 이 특별 대국에서 신진서가 7번을 내리 이겨 버립니다. 현재 두 기사의 상대전적은 25승 20패로 신진서가 앞섭니다. 그러고 보면 박정환도 대단합니다. 아무리 고수라도 7연패를 당하면 무너지게 마련인데, 박정환은 건재합니다. 박정환은 국내 랭킹 2위이자 세계 바둑 랭킹 사이트 ‘고 레이팅(Go Ratings)’ 기준 세계 랭킹 3위입니다.

밀레니엄 키드

2013년 1월 열세 살이 된 신진서 9단. 그는 2012년 7월 영재 입단대회를 통해 프로기사가 됐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2013년 1월 열세 살이 된 신진서 9단. 그는 2012년 7월 영재 입단대회를 통해 프로기사가 됐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신진서는 2000년 3월 17일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2012년 7월 17일 제1회 영재 입단대회를 통해 프로기사가 됐습니다. 열두 살에 프로기사가 됐으니, 천재가 맞습니다. 역대 5위 기록이라고 합니다. 조훈현 9단이 아홉 살에, 이창호 9단이 열한 살에 입단했습니다. 신진서는 한국 바둑에서 프로기사가 된 첫 2000년대생입니다.

신진서 아버지가 부산에서 바둑학원을 했었다고 합니다. 신진서는 아버지를 따라서 어렸을 때부터 바둑을 배웠고요. 신진서 가족은 2012년 2월 서울로 이사했습니다. 물론 신진서 때문입니다. 부산에선 체계적으로 바둑을 가르치기가 어려웠다네요. 지금 신진서 가족은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삽니다. 신진서의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입니다. 충암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학업을 중단했습니다. 바둑 때문이지요. 바둑 말고는 딱히 취미도 없습니다. 지금도 온종일 바둑을 두고, 가끔 꿈에서도 바둑을 둔답니다.

바둑 명문 충암도장 출신으로 알려졌으나 사실 신진서는 독학으로 세계 최강이 된 매우 특이한 사례입니다. 서울 충암도장에 들어간 지 5개월 만에 프로기사가 됐으니까요. 그럼, 신진서는 어떻게 바둑을 공부했을까요. 인터넷입니다.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바둑만 뒀답니다. 입단 전이었는데 커제 같은 중국 프로기사하고도 수시로 인터넷 바둑을 뒀다네요. 커제하고는 지금도 종종 인터넷에서 붙습니다. 그럼 인터넷에서 난리가 나지요. “신진서랑 커제랑 붙었어” 소문이 퍼지면 이내 인터넷에 몰려가 세기의 대결을 관람합니다. 옛날 학교에서 싸움이 나면 우르르 달려나가 구경했던 것과 비슷한 장면이 연출됩니다.

신진서는 현재 인공지능과 가장 비슷한 바둑을 두는 기사로 통합니다. 신진서 바둑을 인공지능에 돌려보면 수순 대부분이 블루 스폿과 겹친다지요. 인공지능이 계산한 최선의 수가 블루 스폿입니다. 기보를 봐도 신진서 바둑은 여느 바둑과 다릅니다. 싸움 잘하는 건 옛날부터 유명했고, 요즘엔 형세판단도 정확해 의외로 쉽게 이길 때가 많습니다. 하나 신진서 바둑의 최고 강점은 승부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입단 전 인터넷 바둑을 둘 때 원칙이 있었다죠. ‘이길 때까지 둔다.’ 지금도 한 판 지면 분해서 잠을 설친다고 합니다.

세계 정벌에 나서다

신진서 9단이 23일 삼성화재배 16강전에서 중국 판팅위 9단과 대국하는 모습. 신진서 9단이 불계승했다. 사진 한국기원

신진서 9단이 23일 삼성화재배 16강전에서 중국 판팅위 9단과 대국하는 모습. 신진서 9단이 불계승했다. 사진 한국기원

세계 바둑 랭킹 사이트 ‘고 레이팅’에 따르면 세계 랭킹 1위는 신진서입니다. 랭킹에선 세계 1위이지만, 아직은 신진서가 세계 최강이라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중국 최강이자 세계 랭킹 2위 커제 때문입니다. 메이저 세계 대회에서 커제는 여덟 번 우승했으나 신진서는 두 번 우승이 전부입니다. 상대전적도 5승 11패로 신진서가 크게 밀립니다.

2020년 11월 신진서에겐 세계 제패를 선언할 절호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삼성화재배 결승에서 커제와 맞붙었거든요. 이미 같은 해 2월 박정환을 꺾고 LG배에서 우승한 신진서였기에, 커제마저 물리치면 당대 2위와 3위를 모두 결승에서 꺾고 메이저 세계 대회 타이틀을 잇달아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승 1국에서 통한의 마우스 실수가 나왔습니다. 인터넷이 스승이라던 신진서에게 마우스 실수라니요. 뜻밖의 사고로 망친 1국 때문이었는지, 2국에선 유리했던 바둑을 막판에 역전당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지길 싫어하는 신진서입니다. 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올해 목표를 세웠습니다. “2021년엔 세계 대회에서 한 판도 지지 않겠다.” 2021년이 두어 달밖에 안 남은 현재, 신진서는 놀랍게도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고 있습니다. 23일 삼성화재배 16강전에서 중국 랭킹 6위 판팅위에 낙승을 거두면서 신진서는 올해 세계 대회 연승 기록을 13번으로 늘렸습니다.

올해 신진서가 세계 대회에서 보여준 모습은 무시무시합니다. 2월 한·중·일 국가 대항전인 농심신라면배 세계 바둑 최강전에서 5연승을 내달아 한국의 우승을 이끌었고요, 9월엔 춘란배를 거머쥐며 생애 두 번째 메이저 세계 대회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11월 초순 삼성화재배가 끝나면 바로 시작하는 LG배도 8강에 진출해 있고요, ‘바둑 올림픽’이라 불리는 응씨배 결승에도 진즉에 올라갔습니다. 응씨배 결승 일정은 아직 안 나왔으나, LG배는 내년 2월이면 끝납니다. 올겨울이 지나면, 한국 바둑의 미래 신진서는 세계 바둑의 현재가 돼 있을 겁니다.

23일 현재 8강이 가려진 2021 삼성화재배에서도 신진서의 우승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운도 따릅니다. 지난 6년간 네 번이나 우승컵을 가져갔던 디펜딩 챔피언 커제가 32강에서 탈락했습니다. 아, 신진서는 아쉬웠을까요? 복수할 기회를 놓쳤으니까요. 10년 가까이 세계 바둑은 솔직히 중국 세상이었습니다. 이제 중국의 시대가 저물고 있습니다. 신진서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한국 바둑의 전성기가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밀레니엄 키드의 질주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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