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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값 오를 때마다 꺼내는 ‘마약’

중앙일보

입력

▶지난 8월에 있었던 판교 신도시 분양 및 청약에서 판교 중대형 아파트가 처음 선보였다.

수도권에 신도시가 계속 탄생하고 있다. 1989년 노태우 정부 때부터 노무현 정부까지 신도시로 서울은 완전히 포위되고 있다. 그럼에도 서민들은 집이 없고, 서울의 집값은 오르기만 한다. 정부의 신도시 정책에 중대한 결함이 있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반복될 리 없다. 왜 신도시 개발이 계속되는 것인가? 그 효과는 있는 것인가? 전문가들의 얘기를 들어봤다.

◇왜 자꾸 만드나? =1988년 서울올림픽을 막 끝낸 노태우 정권 말기의 집값은 폭등세였다. 자고 나면 집값이 올라 “1년에 두 배는 올랐다”는 게 당시를 회고하는 사람들의 얘기다. 민심이 흉흉해졌다. 당시 크게 유행한 ‘방 빼!’라는 말도, 당시의 집값 폭등 현상을 빗댄 것이다. 이 같은 폭등세를 잠재우기 위해 노태우 정권이 빼든 칼이 바로 주택 200만 호 건설이다. 분당·일산 등 5대 신도시 개발이 핵심이다. 89년 당시 집값 상승은 주택보급률과 직결되는데 당시 보급률이 서울은 57%, 수도권은 63%에 불과했었다.

분당 등 1기 신도시는 수도권 집값 안정을 겨냥한 카드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신도시는 표심·민심을 겨냥한 정책이었다. 민심을 잃은 정권은 권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당시 노태우 정권이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한 응급처방으로 내놓은 게 바로 분당과 일산 등 신도시 개발이다.

고철 주택산업연구원 원장은 “신도시는 수도권 집수요 충족을 위한 게 첫째 목적이었다”며 “국토 균형개발을 통한 민심회복도 신도시 개발을 촉진한 이유 중 하나였다”고 밝혔다.

노태우 정부를 비롯한 참여정부까지 신도시 개발을 정치적으로만 보는 시각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그렇다고 신도시 개발이 표심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 대표적인 게 바로 판교다. 2003년에 발표된 2기 신도시의 대장 격이다. 당시 판교는 강남 집값이 유독 폭등하자, 대체 신도시를 생각하다가 나온 결과다.

그런데 판교는 당시 평당 2000만원에 분양된다고 알려지면서 ‘역풍’을 불러왔다. 판교와 맞붙은 서울 강남·분당을 중심으로 ‘아파트 폭등 장세’가 연출된 것이다. 당시 분당 사람들 사이엔 “나도 이젠 10억대 부자”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서울 강남은 이 역풍 덕분에 강력한 상승세로 접어들었고, 현재 강남의 평당 가격은 3000만원대를 넘어섰다.

검단 신도시도 마찬가지다. 강남 집값을 잡기 위해 내놓은 2005년 8·31조치에도 최근 전셋값 불안, 강북 집값 강세를 비롯해 강남까지 강한 오름세로 돌아섰다. 그러자 민심이 참여정부를 비판했고, 결국 추병직 건설교통부 장관이 서둘러 발표부터 해놓고 본 게 바로 검단 신도시다.

김영봉 중앙대 교수(경제학)는 “노무현 대통령이 재직시에 무엇인가 이루려고 애를 쓰면서 신도시 계획을 발표했지만 제대로 되는 게 없다는 인상”이라고 말했다. 그는 “게다가 지금이 경기침체기여서 경기부양을 하려는 정치적 목적에서 신도시를 거론했을 수도 있다”고 분석한다.

박상언 유엔알컨설팅 사장은 “내년 대선을 앞둔 여당이 신도시 등을 통해 경기부양을 하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지적한다.

물론 주택공급 확대를 위한 정책으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분석도 있다. 박재룡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89년 신도시 발표 때부터 갖가지 억측이 나오기는 했지만, 수도권의 집 공급 확대가 반드시 필요한 것만은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실제 수도권의 경우 인구가 매년 10만~20만 명씩 늘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2005년 현재 주택보급률은 서울이 89.7%, 수도권이 96.8%다.

◇신도시 효과는 있는가 =서승환 연세대 교수(경제학)는 “양질의 집 공급을 일거에 체계적으로 늘리는 방법은 사실 신도시밖에 없다”고 말한다. 또 “최근 신도시의 고분양가와 주변 집 가격에 주는 영향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지만, 고분양가라도 집 공급이 늘어나면 장기적으로 전체 집값은 안정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고분양가는 신도시 분양 초기에 생기는 심리적인 문제일 뿐이란 얘기다.

고철 원장도 “실제 1기 신도시는 집값 안정에 크게 기여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서울올림픽 직후에 집값이 폭등하자 89년 4월 분당 등 1기 신도시 계획이 발표됐고, 그해 11월에 첫 분양에 들어갔다. 서울지역 아파트값은 분당 등 1기 신도시가 처음 입주한 91년에 4.5% 내렸고, 이어 92년 4.3%, 93년 2.8% 떨어졌다. 이후 95년까지 안정세를 보였다. 강남 아파트가 하락세를 면치 못했던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하지만 2기 신도시 이후에는 신도시 약발이 크게 떨어진 느낌이다. 비싼 토지보상가, 고분양가, 서울과 먼 거리에 있는 위치 같은 문제가 겹쳐 효력이 떨어진 것이다.

▶89년 분당 신도시 건설 반대를 알리는 플래카드 대자보가 분당 신도시 개발지의 한 농가 담벼락에 걸려 있다.

서승환 교수는 “앞으로 2기, 3기 신도시 개발이 본격화되면 위치나 주거형태에 대한 의문점이 생길 수 있다”고 지적한다. 신도시 위치가 서울과 30~40km 이상 떨어져 있으면 신도시 효과가 떨어진다는 얘기다. 또한 신도시 자체에 임대주택을 30% 정도 섞어 지으면 메리트도 떨어질 것이란 전망이다.

박원갑 스피드뱅크 연구소장은 “2기, 3기 신도시 실패 요인 중 하나는 토지보상비가 너무 비싸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신도시 개발이 아니라면 팔리지도 않을 땅들이 토지보상이 시작되면 시세와 비슷하게 보상금을 받게 된다. 이 때문에 신도시 토지보상가와 분양가가 더 올라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는 얘기다.

그보다 심각한 것은 신도시를 만들 땅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박재룡 연구위원은 “지금은 89년에 5대 신도시 개발을 할 때와 비교할 때 땅이 없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또 과거처럼 정부 의지대로 순식간에 신도시 사업을 벌일 수도 없어 자꾸 사업기간이 길어지는 것도 문제다. 1기 신도시는 89년 발표 후 그해 곧바로 분양(분당)에 들어갔지만, 판교는 2001년 계획 발표 후 분양까지 5년이나 걸렸다.

박상언 사장은 “신도시 발표로 주변 집값이 폭등하고, 거기서 10% 할인한 선에서 신도시 아파트 분양가를 정하고, 다시 신도시 아파트값이 오르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고 밝혔다.

◇분양가 폭등에 서민은 ‘괴로워’ =신도시 분양가가 치솟는 게 서민들에겐 고통이다. 사람들 기억 속에서 이미 사라진 수치이기는 하지만, 89년 분당 최초 분양가는 평당 170만~200만원에 불과하다. 분당 서현동 시범현대아파트 33평형은 분양가가 단돈 5500만원이다. 그런데 분당 옆의 판교는 중대형 아파트의 평당 분양가가 1800만원에 달했다. 단순 비교를 하면 17년 만에 두 신도시 분양가가 9배나 오른 셈이다. 참고로 분당 시범단지 거래가는 현재 평당 2000만원을 넘어섰다.

신도시 분양가 폭등은 일산도 마찬가지다. 92년 4월 분양 당시 일산 강선마을 경남아파트 38평형이 8922만원(채권상한액 1140만원)으로 평당 230만원 선이다. 그런데 일산 바로 위에 있는 파주운정 신도시 분양가가 최근 평당 평균 1297만원으로 책정이 됐다. 분양가가 14년 만에 5.6배나 오른 셈이다. 이 같은 고분양가 덕분에 판교 신도시는 ‘귀족들만의 도시’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신도시 무용론’ 대두 =김영봉 교수는 “노태우 정부가 1기 신도시를 만들 때와, 지금 노무현 정부가 3기 신도시를 만드는 때를 비교하면 상황이 많이 다르다”고 지적한다. 노태우 정권 당시에는 국내경기가 호황인 데다 수도권에 집이 모자라서 집값이 폭등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부가 인위적으로 서울에 대한 온갖 제도적·물리적 규제를 하면서, 곁가지로 나온 산물이 바로 신도시라는 얘기다. 잘못된 부동산정책의 결과라는 것이다. 회초리를 들어도 안 되니까 당근을 주는 격이다.

김 교수는 “정부가 강남 등에 대한 재건축·재개발 규제를 풀고, 보유세를 높이고, 양도세를 내리는 등 주택을 시장에 맡겨야 한다”면서 “만일 이 같은 규제가 없다고 하면, 굳이 신도시를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다”고 강조했다.

박재룡 연구위원도 “무작정 신도시 개발에 전념하기보다는 서울 강남·강북의 용적률을 완화해 기존 도심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신도시를 개발하려면 도로·지하철·교통망·상업시설 같은 인프라를 깔아야 하는데 돈이 많이 든다. 신도시 확대보다는 기존의 도시 개발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얘기다.

외국의 신도시 모습들

‘신도시’ 통해 ‘구도시’ 경쟁력 높여

호주의 캔버라는 계획적으로 조성된 대표적인 신도시로 창원시가 만들어질 때 모델이 됐다.

신도시는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외국의 대표적인 도시들도 신도시 건설로 탄생한 곳이 많다. 대표적인 곳이 호주의 행정수도인 캔버라. 캔버라의 가장 큰 특징은 행정도시와 그 밖의 주거·상업지역의 기능을 완전히 분리한 것이다. 이는 도심의 팽창으로 수도가 비대해지는 것을 막고 위성도시들을 연계 개발함으로써 도시의 쾌적함을 높이자는 의도다. 실제 캔버라 시 당국은 도심 다운타운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5층 이상의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했다.

프랑스 파리 인근에 있는 라데팡스도 대표적인 신도시로 꼽힌다. 라데팡스는 특히 새로운 주거공간 확충이라는 일반적인 개념이 아닌 업무기능 창출에 주안점을 두고 개발된 ‘경제지향적’ 신도시의 전형으로 꼽히고 있다.

라데팡스는 거대한 복층 도시구조를 갖고 있다. 도로·지하철·철도·주차장 등 모든 교통 관련 시설은 지하에 설치되고, 그 위에 건축물 여유공간 등이 만들어졌다. 이 같은 복층구조는 교통효율의 극대화, 파리의 전통인 역사성과 예술성의 강조, 공간활용도 제고, 개발비용 절감 등을 두루 겨냥한 것이다. 세계의 기업들을 유치하고 신도시의 주거기능을 활성화하기 위해 완벽한 교통망을 구축하는 것은 개발 초기부터 최우선적 과제였다.

독일의 매르키셰 피어텔은 아파트에 대한 독일인들의 선입견을 바꿔놓은 대표적인 신도시로 꼽힌다. 아파트 위주의 신도시 개발을 추진하는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밖에서 보는 이 도시의 모습은 흡사 경부고속도로 옆 분당 신도시의 아파트군과 같은 형태다.

그러나 단지 안으로 한 걸음만 들어서면 고층아파트의 콘크리트 구조물은 거의 보이지 않는 녹지공간이 펼쳐진다. 아파트 동 사이의 공간에는 독특한 조경술로 가꾼 정원을 두었다.

이 정원은 삼각형, 마름모꼴, 원형 등 기하학적인 나무울타리로 5~6개의 작은 공간으로 다시 나뉘어 있다. 이를 보면 지루한 기분이 금세 없어진다. 또 블록과 블록 사이, 단지 외곽 등의 경계에는 숲 울타리나 호수, 작은 개천을 배치해 단지 전체와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이 도시는 기본적으로 베를린의 인구분산을 위한 ‘베드타운’으로 만들어졌다. 자족도시가 아닌 베드타운으로 구상된 것은 베를린과의 교통 편리성이 확보돼 있었기 때문. 이 도시와 베를린 간에는 순환 고속도로와 지하철이 연결돼 있다.

영국 런던 인근의 도클랜드도 한국으로선 참고할 만한 도시다. 도클랜드는 ‘재개발’ 방식을 통해 조성된 신도시다. 슬럼가 모습이었던 도시 주변 낙후지역을 현대적인 도시로 개조했다. 도클랜드의 개발이념은 낙후되고 과밀한 도시 주변을 개조, 런던의 전반적인 경쟁력을 높인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집단 재개발을 통해 주거·업무·상업 기능을 이상적으로 결합, 쾌적한 주거환경을 창출해내는 것은 물론 도시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선진국들은 신도시 개발을 통해 기존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고, 경쟁력을 향상시키고 있다.

이석호 기자·lukoo@joongang.co.kr

유상원 기자 [wise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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