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 올 수시 논술 1번 답안 3700장 중 2000장 판박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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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서강대 수시 2학기 논술고사 답안지 3700여 장을 채점하던 교수 10명은 깜짝 놀랐다. 논술 1번 환경 관련 문제에 대해 2000장가량의 결론이 엇비슷했기 때문이다. "근대화를 추진하되 그로 인해 발생하는 환경문제를 최소화하는 '지속 가능한 개발'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얼핏 보기엔 나무랄 데 없다. 하지만 서강대 측은 이렇게 답변한 학생들에게 낮은 점수를 줬다.

채점위원 Z교수는 "(수험생) 본인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미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라는 것이었는데 학생들은 너무 보편적인 답변만 써놓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흔한 표현은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좋은 환경을 만들자'였다.

Z교수는 "이렇게 비슷한 표현이 무더기로 나온 것은 논술학원에서 '개발'이란 주제가 나오면 무조건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고 답하도록 가르쳐서인 것 같다"고 말했다.

서강대는 잘 쓴 답변으로 "내가 시장이라면, 주민들의 의견을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물어 이러저러한 개발을 하거나 보존을 하겠다"는 식으로 자기 언어, 자기 논리를 편 것을 들었다.

판에 박은 듯한 결론은 3번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청산별곡 등 네 가지 글을 주고 넷 중 하나의 입장을 선택해 나머지를 비판하라는 문제였다. 절반이 넘는 답안이 "서로의 입장과 의견을 조율해야 한다"였다.

서강대 측은 "나머지를 비판하라고 요구했는데도 학생들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려 했다"며 "학원 논술 강의에서 가르치는 전형적인 양시론(兩是論)적 태도"라고 지적했다.

김영수 입학처장은 "사교육에서 배운 대로 결론을 낸 것으로 보이는 답안지는 대부분 불합격 처리했다"고 말했다.

◆ 서강대 1번 문제

▶문항='제시문 (가)는 근대화 과정에서 라다크 사람들의 삶의 변화를 묘사하고 있다. 이 변화와 관련하여 제시문 (나)의 관점을 평가하고, 본인이 생각하는 라다크의 바람직한 미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시오.'

▶제시문 (가)=인도 잠무카슈미르주의 고산지역인 라다크에서 농민들은 가난하지만 자립적으로 살았다. 서구식 개발이 시작되면서 환경이 오염됐다… (중략) 하지만 현대사회의 침입이 흉하고 부적절하게 보여도 그것이 물질적 이익을 가져온 게 사실이다….

▶제시문 (나)=환경 파괴가 성장뿐 아니라 빈곤과도 관계 있다. 불평등은 가장 중대한 환경문제다…. (중략) 선진국의 환경 파괴와 개발도상국의 환경 파괴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성대 논술 문제 강남 학원 답안
성대, 채점해 보니 낙제점

취재팀은 사교육 학원들이 가르치는 논술 정답과 대학 측이 요구하는 내용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확인해 봤다. 서울 강남에서 잘나가는 모 학원의 '기출문제 분석' 자료집을 입수했다. 여기에는 12개 대학의 최근 5년간 논술문제 모범답안이 실려 있었다. 답안은 이 학원 강사 12명이 만든 것이다. 그중 성균관대 2005학년도 정시 논술문제 답안으로 돼 있는 걸 성균관대 측에 건네주고 채점을 의뢰했다. 당시 이 대학 논술문제는 4개였다. 이 중 3번은 어느 국가에서 1년 동안 고전음악과 대중음악 연주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통계표를 보여준 뒤 비판적이거나 아니면 긍정적으로 해석해 보라는 것이었다.

학원 측의 모범답안에는 "대중음악의 주된 소비층인 젊은 세대의 연령대별 대중음악 참석률이 모두 비슷하다. 이는 표준화된 문화상품이 청중의 반응을 표준화시킨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돼 있다. 해당 문제를 내고 채점한 성균관대 Q교수는 "3번 답변은 제대로 된 점수를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청중의 반응이 표준화된다는 내용은 제시된 표 어디에도 없다. 과장된 해석"이라고 말했다. 성균관대는 이 학원의 2005년 논술 모범답안 4개의 전체 점수를 C로 판정했다. 성균관대는 A~E까지 등급을 나눠 C 이하는 논술에서 불합격이다. 수험생이 이 학원의 모범답안대로 썼다면 대학 입학이 어렵게 된다.

그러나 학원 측은 "출제위원이 생각하지 못한 창의적인 답변을 쓴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려대 이재훈 논술출제위원장은 "논술은 따로 정답이 있는 게 아니고 학원에서 단기간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라며 "어려서부터 책과 신문을 많이 읽고, 비판적인 사고를 기르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논술은 '족집게'나 '단기 승부'는 안 되고 오히려 부작용만 크다는 것이다.

이석록 대치 메가스터디 원장은 "학원논술은 주제가 주어지면 어떻게 시작해 어떻게 끝내라는 식으로 훈련하는 게 사실"이라며 "학원은 성과를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조급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서울 강남구 대치동 K학원 원장은 "우리는 1년 내내 논술만 연구하는 데 일선 학교가 우릴 당해낼 수 없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 양영유.강홍준.이원진.김은하.박수련 기자

◆서강대 논술 문제지

◆성균관대 논술 문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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