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공문 온 날, 이철희도 왔다…송영길 '재갈법 고집' 꺾은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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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3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는 모습. 이때까지만 언론중재법 개정안 강행을 시사했던 송 대표는, 이날 오후 "시간을 갖고 더 논의하자"며 입장을 급격히 선회했다. 임현동 기자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3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는 모습. 이때까지만 언론중재법 개정안 강행을 시사했던 송 대표는, 이날 오후 "시간을 갖고 더 논의하자"며 입장을 급격히 선회했다. 임현동 기자

“송영길 대표, 윤호중 원내대표, 원래 이런 사람들 아니지 않습니까.”

학계와 언론단체에서 ‘언론재갈법’이란 비판이 나오고 있는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언론중재법) 개정안에 대해 30일 밤 더불어민주당 의원총회에서 당 지도부가 “시간을 더 갖고 논의하자”는 취지로 얘기하자, 한 수도권 재선 의원이 거세게 항의하며 한 말이다. 이 발언이 나온 30일 밤은 당초 민주당 지도부가 언론중재법의 국회 본회의 상정을 예고한 ‘디데이(D-day)’였다.

강경파 의원들은 특히 송 대표의 변화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송 대표가 이날 오전만 해도 언론중재법을 “최소한의 조치”라고 지칭하며 강행 처리를 시사했기 때문이다. 민주당 내부에선 “지도부가 갑자기 입장을 바꾸면 어떡하냐. 그동안 문화체육관광위원회와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강행했던 의원들만 바보 되는 것 아니냐”(수도권 초선 의원)는 말도 나왔다.

그간 송 대표는 고비마다 언론 인터뷰에서 “허위보도를 했다고 언론사 면허를 취소하는 건 아니잖으냐”(지난 26일, MBC 인터뷰)는 논리를 펴며 언론중재법 강행을 지휘했다. 민주당 안팎에선 이런 송 대표의 강경 행보를 그의 별명 ‘황소’와 연관 지어 “황소고집이 언론법에 꽂혔다”, “언론개혁 전사 이미지를 얻기 위한 황소걸음이 시작됐다”는 평가도 나왔다.

하지만 송 대표는 끝내 강행 처리 대신 숙의 과정을 선택했다. 31일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관련 협의체’를 구성해 9월 26일까지 논의하기로 합의했다. 송 대표의 ‘황소걸음’이 멈춘 이유로는 “국회의장과 유엔 공문 등 두 가지 돌발 변수가 영향을 끼쳤다”(당 관계자)는 분석이 나온다.

①박병석 국회의장의 중재

박병석 국회의장(사진 가운데)는 언론중재법 갈등의 막판 중재를 주도했다. 3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박 의장 주재로 열린 여야 원내대표 회동에서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오른쪽)와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왼쪽)이 언론중재법 협의체 구성 등이 담긴 합의문을 교환 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박병석 국회의장(사진 가운데)는 언론중재법 갈등의 막판 중재를 주도했다. 3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박 의장 주재로 열린 여야 원내대표 회동에서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오른쪽)와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왼쪽)이 언론중재법 협의체 구성 등이 담긴 합의문을 교환 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박병석 국회의장은 30일 언론중재법 상정을 요구하는 윤호중 민주당 원내대표를 향해 시종일관 “양당이 합의하지 않으면 본회의를 개최할 수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차기 대통령 선거가 6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9~12월 정기국회 동안 내년도 예산안과 국정감사, 각종 민생 법안 처리 등 성과를 내야 하는 박 의장으로서는 “여야의 정면충돌은 피해야 한다”고 판단했다는 게 주변의 설명이다.

실제 국회 본회의 개최 무산 이후 민주당 내 강경파의 화살은 박 의장을 향했다. ‘언론중재법의 코디네이터’라 불리며 입법 전 과정에 관여했던 김승원 민주당 의원은 이날 새벽 페이스북에 박 의장의 실명을 거론하며 “역사에 남을 것”이라고 비난했다.

다만 박 의장의 중재가 언론중재법을 멈춰 세운 유일한 이유인지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린다. 수도권의 한 민주당 의원은 “박 의장이 고집스레 양당 협상을 요구한 게 강행 중단의 한 원인이 된 건 맞다”라면서도 “그러나 국회의장의 중재는 변수가 아니라 상수(常數)다. 다른 사정이 있지 않았겠냐”고 말했다.

②유엔 공문…외통위원장 마음 움직였나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왼쪽 두 번째)가 지난 7월 서울 용산구 한남동 EU 대사관저에서 프란스 티머만스 EU집행위원회 수석부위원장,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등과 만찬을 하고 있다. 송 대표가 언론중재법 강행 처리를 중단한 데 대해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의 공문이 영향을 미쳤으리란 분석도 나온다. 연합뉴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왼쪽 두 번째)가 지난 7월 서울 용산구 한남동 EU 대사관저에서 프란스 티머만스 EU집행위원회 수석부위원장,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등과 만찬을 하고 있다. 송 대표가 언론중재법 강행 처리를 중단한 데 대해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의 공문이 영향을 미쳤으리란 분석도 나온다. 연합뉴스

여당 내부에서 송 대표가 강행 처리를 중단한 이유로 유력하게 지목된 건 전날 민주당에 도착한 유엔의 공문이다. 유엔 인권이사회(UNHRC) 산하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ffice of the 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 for Human Rights·OHCHR)에선 민주당에 언론중재법이 세계인권선언 및 자유인권규약에 위반했다는 의혹에 대한 반론 제출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다.

이는 지난 24일 비영리 인권단체인 전환기정의워킹그룹(TJWG) 등이 언론중재법 개정안과 관련해 유엔 표현의자유 특별보고관에게 진정서를 발송한 데 따른 것이다. 송 대표는 전날 의원총회에서 이런 소식을 전하며 “국경없는기자회에서 발표한 성명과 비슷한 내용인데, 우리도 여러 가지를 종합적으로 검토해보자”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민주당 내부에선 유엔 공문이 여권 내 대표적인 ‘외교통’인 송 대표의 마음을 돌렸을 거란 관측이 많다. “외교통일위원장을 지낸 송 대표가 국제 사회의 우려를 먼저 해소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하지 않았겠냐”는 해석이다. 다만 유엔에 대한 소명 절차를 마친 뒤엔 송 대표가 결국 언론중재법 개정을 재추진할 거란 전망이 많다. 민주당 고위관계자는 이날 중앙일보에 “유엔에 언론중재법 진정서를 낸 단체(TJWG)는 우파 성향이 강하다”며 “유엔이 우리 측 의견을 요청한 것이니, 균형 있게 의견이 전달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③“유엔 공문에 바뀌겠냐”…제3의 변수 추측도

일각에선 유엔 공문 외에 다른 변수가 영향을 미쳤다는 관측도 나온다. “유엔 공문 내용은 의견을 내라는 것 뿐인데, 이걸로 입장이 바뀐다면 이미 국경없는기자회 성명 때 바뀌었어야 하는 것 아니냐”(여권 고위 관계자)는 설명이다.

실제 민주당 내부에선 전날 저녁 이철희 청와대 정무수석의 국회 방문에 의미를 부여하는 의원들도 적지 않다. 이 수석이 20분 간 민주당 원내지도부를 만난 뒤로 강행 기류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간 언론중재법 논란에 대해 침묵해 온 문재인 대통령도 이날 국회 논의 결과를 접한 뒤엔 환영 입장을 나타냈다. 문 대통령은 이날 박경미 대변인을 통해 “국회에서 여야가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대한 추가적인 검토를 위해 숙성의 시간을 갖기로 한 것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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