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발해 '한국의 식량창고'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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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4억 평! 연해주에 서울시 크기만 한 이 땅을 한국인이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지금도 적잖은 농산물이 생산되지만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경작이 본격화되면 ‘한국의 식량창고’ 역할을 충분히 해낼 전망이다. 원가가 적게 들어 국제농산물시장에서 가격경쟁도 된다. 기업인들의 발길이 계속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어떻게 개발할까? 성공할 수 있을까? 연해주에 직접 다녀왔다.


10월 21일 토요일. 젬추쥐느농장에서 맞은 연해주의 첫 저녁시간은 낯설다. 3박4일 일정으로 북한전문가·기업인·농업인 등 20여 명이 함께한 이번 아그로상생농장 시찰은 여느 해외시찰과 많이 다르다. 숙소만 봐도 그렇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버스로 네 시간을 달려온 숙소는 농장의 한국 파견 근로자들이 묵는 ‘단체용’이다. 한 방에 5~6명씩 함께 잔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칠흑 같은 어둠과 유난히 밝은 별뿐이다.

보통의 해외시찰이란 게 그렇다. 낮에는 보고 듣느라 바빠도 해만 지면 여유가 있다. 유흥과 오락, 쇼핑을 즐기며 자유시간을 갖는다. 그런데 이번 시찰단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저녁식사 때 시작한 토론이 새벽까지 이어진다. 나중에는 삼삼오오 나눠졌고 마지막 팀은 새벽 3시가 돼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10월 22일 일요일.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낮에는 몇몇 농장을 짬짬이 돌며 하루 종일 달리기만 한다. 두 번째 숙소는 루비노브카농장. 저녁식사 때부터 시작된 토론은 또다시 끝날 줄 모르고…. 딱 한 시간 예외가 있었다. KBS의 대형 사극 ‘대조영’이 방영되던 시간이었다. 이때만큼은 시찰단 모두가 거실 마루에 앉아 ‘대조영’을 봤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프로는 꼭 보는데 어제는 못 봤다”는 이동명 아그로상생농장 상무는 “옛 발해 땅에서 보면 전혀 다른 맛이 날 것”이라고 말했다.

현 경작지 겨우 15%

연해주로 불리는 프리모르스키 지역은 광활하다. 두만강 한 귀퉁이에서 시작해 동으로는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서로는 사할린에 이른다. 전체 면적은 16만6000㎢. 우리나라(남한)의 1.6배다. 해변으로 산맥이 뻗어 있지만 농장이 주로 위치한 중북부 지역에는 평야가 널려 있다. 인구는 불과 200만 명. ‘사람 찾기 어려운 허허벌판’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4억 평! 서울시보다 좀 크고 제주도보다 좀 작은 땅이다. 연해주의 이 땅을 우리 한국인이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연해주 전역 17곳(인수작업 중인 6곳 포함)에 산재해 있는 농장 전체를 합하면 연해주 농지의 20%에 해당한다. 어마어마한 규모다. 개간은 아직 미흡하다. 전체 농장의 15% 수준이다. 현재 수확량은 쌀 1만t, 콩 1만5000t에 그친다. 소나 돼지, 사슴 등 가축이 4000마리 정도다. 농장 근로자는 750명. 한국인 30명, 고려인 50명을 뺀 대부분이 러시아 현지인이다.

나머지 땅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밤샘 토론의 핵심 주제는 여기에 있다. 전체 토지를 다 경작할 경우 쌀은 최고 30만t, 콩은 50만t까지 생산할 수 있다. 가축은 수십만 마리까지 키울 수 있다. 좁은 땅에서 땅값에 치인 한국인들이어서 일단 이 ‘땅’을 보면 그 ‘활용’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연해주를 한국의 식량창고로 만들어야 합니다. 식량안보가 세계적인 화두로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농업은 죽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연해주가 그 대안을 만들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이병화 국제농업개발원장)

가장 먼저 제기된 방안이 바로 ‘한국의 식량창고’다. 중요하다. 세계가 하나가 되고 돈만 있으면 뭐든 살 수 있다 해도 식량만큼은 문제가 다르다. 석유처럼 ‘무기’로 돌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식량안보’란 그래서 나온 개념이다. 제조업과 서비스업이 출중한 선진국이라 해도, 그래서 농산물시장의 개방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해도, 대부분의 선진국은 식량을 자급한다. 식량자급이 안 되면 결국 남의 손에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것과 같다.

“연해주를 한국의 식량창고로”

한국은 어떤가. 식량자급률이 기껏 28%에 불과하다. 그나마 쌀이 있어 이 정도다. 쌀을 빼면 이 수치는 5%로 뚝 떨어진다. 세계 식량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기업이 한마디만 해도 나라 전체가 움찔거릴 판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한국에서 가까운 지역에 농산물을 경작할 수 있는 땅 4억 평이 있다는 것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우리 땅처럼 활용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가 있다. 땅을 빌려 농장을 경영하고 있는 대순진리회도 이 점을 안다.

“식량은 절대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남에게 의존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식량안보’ 안에는 그런 의미도 내포돼 있습니다. 민족종교인 대순진리회가 그 해결책을 모색하다 연해주 농장 인수를 생각했던 것입니다.”(이동명 아그로상생농장 상무)

▶수확한 콩을 들고 있는 이병화 국제농업개발원장. 1989년 연해주 개발을 시작한 그는 현대 한국인이 주도한 연해주 개발사의 산증인이다.

대순진리회가 연해주 농장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2000년부터다. 우연한 기회에 연해주를 방문했던 이유종 대순진리회 종무원장이 직접 주도해 2년 동안 위탁경영으로 경험을 쌓은 후 본격화시켰다. “대순진리회의 철학과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전반적인 문제 등을 감안했다”는 김진원 대순진리회 총무부장의 설명에서 참여 배경을 알 수 있다.

이병화 국제농업개발원장은 실무작업을 이끈 사람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농업생산담당관(국장급)을 지내기도 했던 이 원장은 89년 고르바초프 당시 러시아 대통령의 극동지역 농업경제자문관으로 활동하면서 연해주 개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연해주 개발은 한국의 자본, 북한의 노동력, 러시아의 자원 등 3개 요소가 하나가 돼야 한다”는 ‘트라이앵글 방식’을 강력하게 주장해온 그의 이론은 러시아의 연해주 개발 정책으로 정식 채택되기도 했다. 이 원장은 “많은 국내 대기업과 기업인이 연해주에 관심을 가졌고 실제로 참여도 했지만 이번만큼 성공을 거둔 적은 없었다”며 높이 평가했다.

50년 임차비 평당 1원

농장 인수방식은 특이하다. ‘매입’이 아닌 ‘임차’다. 50년을 단위로 주 정부와 계약을 체결한다. 임차 내용의 특이한 점은 토지와 시설을 나눈다는 점이다. “토지는 50년 임차, 시설은 완전 소유 개념”이다.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 것이 임차비. 구체적인 가격을 밝히지는 않지만 “싼 경우 평당 1원인 경우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4억 평 가까운 땅을 임차하는 데 든 경비는 얼추 100억원. 평당 20원 좀 더 되는 셈이다. 물론 여기에는 건조·저장시설이나 건물, 농기계, 수로 등 구입비까지 ‘포함’된다. 매년 주 정부에 경작지만을 대상으로 ‘사용료’를 별도로 지불하지만 ‘소액’이다.

▶호롤농장의 콩 제분 공장. 농지는 임차지만 이런 시설물들은 모두 사유(私有)가 가능하다.

이런 설명을 듣는다면 누구나 탐을 낸다. 몇십 평짜리 아파트가 10억~20억원씩 하는 나라에서 살기 때문이다. 그 돈이면 수천만 평의 땅을 임차할 수 있다. ‘임차’라지만 그 기간이 무려 50년인 데다 수로·농로 등이 ‘사유’라서 맘만 먹으면 땅을 영구적으로 쓸 수 있다. 그런데 이전의 기업이나 기업인들은 왜 실패했을까?

“임차비야 싸지만 그게 다가 아니지요.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추위 때문에 수확기간이 짧다는 게 문제입니다. 대량의 농기계 구입을 위한 투입 자본이 엄청난 것입니다. 7억원짜리 농기계 10대면 벌써 70억원입니다. 배보다 배꼽이 큰 셈이지요.”(이병화 원장)

결국 임차 후 투자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실패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답은 하나다. 판로를 개척해야 한다. 시찰단 의견은 몇 가지로 좁혀진다.

다양한 판로 개척이 열쇠

특히 콩에 관심이 집중된다. 무엇보다 자동차의 이산화탄소 배기량을 줄이기 위해 경유에 콩으로 만든 바이오디젤을 섞어야 하기 때문에 콩 수요가 세계적으로 폭발한다는 것이다. 적잖은 전문가가 이제 ‘산업의 쌀’로 콩을 꼽기도 한다.

“2010년까지 경유의 바이오디젤 함유량을 현재 0.5%에서 5%로 늘려야 합니다. 국내 콩 수요도 폭발할 전망입니다. 현재 소비량이 190만t에서 800만t으로 무려 네 배가 늘어납니다. 안정적인 공급처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에서 연해주는 우리의 ‘희망’인 셈이지요.”(김종완 쓰리엠안전개발 전무)

▶개발을 기다리는 루비노브카농장. 6000만 평의 땅에 사슴만 수백 마리 있을 뿐이다.

(※시찰 중 콩 농장을 유심히 살펴본 김종완 전무는 며칠 뒤 모회사인 소마시스 코리아의 이정우 대표와 함께 다시 농장을 찾아 콩의 재배·가공·판매와 관련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아그로상생농장은 다른 농장 구입분까지 합해 향후 20년 동안 소마시스 코리아에 연간 30만~100만t의 콩을 제공한다는 내용이다.)

콩은 바이오디젤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마늘즙으로 키운 ‘마늘콩나물’ 재배기술을 특허 낸 양완석 농수식품 대표는 “국내에 무공해 농산물을 공급하는 데 연해주는 매우 유용하다”며 “수입 농산물의 안전성을 담보할 수 없는 현실에서 큰 기여를 할 것”으로 내다봤다. 양 대표는 연해주의 무공해 콩으로 마늘콩나물을 생산해 학교급식 시장에 내놓을 계획을 갖고 있다.

북한도 좋은 판로가 될 수 있다. 가톨릭 산하의 세계적인 긴급 구민 비정부기구(NGO)인 카리타스 코리아의 대북 지원 실무 책임자 구본태 전 통일부 정책실장은 “카리타스 등 세계 종교단체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북한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을 계속할 것”이라며 “연해주 쪽에서 농작물을 북한으로 직송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이나 미국도 좋은 시장일 수 있다. “무공해 농산물에 관심이 높은 일본이나 미국 쪽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온다”는 김진원 부장은 “연해주가 세계적인 청정농산물 공급지가 되면서 옛 발해의 영화가 되살아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인터뷰 | 이유종 대순진리회 종무원장

“연해주는 해원과 상생의 땅”

이유종 대순진리회 종무원장은 종단의 최종 책임자다. 대학과 병원, 200만 가구의 400만 교인을 이끌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느낌은 전혀 그렇지 않다. 평범한 인상에 힘이 있다 했던가.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다. 연해주 아그로상생농장에서 그를 만났다.

자주 오십니까?
“월 1회는 꼭 옵니다. 원래 농사꾼 출신이어서 논밭이 좋고 친근하네요. 여기저기 둘러보고 곡식이 자라는 것을 보면 행복해집니다.”

어떻게 농장을 경영할 생각을 하셨습니까?
“주요 교리 중 하나가 해원과 상생입니다. ‘원을 풀고 함께 산다’는 의미지요. 이 땅이 바로 그런 곳인 것 같습니다. 독립투사의 후손이 중앙아시아 등으로 강제 이주당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연해주를 고향으로 알고 있는 그들은 다시 돌아올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 원을 풀고 함께 살자는 취지에서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게다가 날로 커지는 식량안보 위협에도 대처할 수 있지 않습니까? 민족종교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이지요.”

현재 고려인 근로자가 많지 않은데요….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 경작이 본격화되면 많은 고려인이 이곳을 찾을 것입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이주와 정착을 위한 지원계획도 갖고 있습니다.”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요?
“판로가 문제입니다. 종교단체가 경영한다고는 하지만 경제성을 따지지 않을 수 없지요. 판로가 확보되면 대규모 자금을 투입할 생각입니다.”

<이코노미스트 8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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