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서 판문점까지… 이찬삼특파원 한달 취재기(다시 가본 북한: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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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줄잇는 해외동포 초청/고향까지 가서 이산가족 만나게 허락/당국배려 선전ㆍ경제도움 겨냥/평생 수절한 부인보곤 “차라리 통일 안됐으면…”
북한당국이 추진하는 해외교포를 대상으로 한 「이산가족재회사업」은 앞으로의 남북문제에 큰 변수로 등장하고 있다.
「7ㆍ7선언」 이후 재미교포들의 방북이 두드러지게 늘자 북측은 이같은 분위기에 편승,「해외동포원호위원회」를 통해 적극적인 유치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과거 교포들이 극비리에 북한을 다녀올 때만 해도 북한의 가족을 호텔로 불러 상봉케 했으나 이젠 과감하게 향리를 직접 방문케 하고 교포들이 소지하고 간 외화를 무제한 받아쓸 수 있도록 묵인하고 있다.
따라서 최근 북한주민들 사이에서는 『재미동포가 찾아온 가족들은 팔자 고친다』는 소리가 나돌고 실질적으로 생활이 달라지는 이웃을 부러워하고 있다.
북한당국은 가족을 만나러 온 교포들이 북한에 있는 친지들의 입장을 고려해 체제비판을 삼가하고 있고 「지도부의 배려속에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는 정치적 선전효과,그리고 인민들에게 경제적 혜택까지 받게 하는 1석3조의 효과를 계산하고 있다.
○만불 주면 20년 노임
실제로 한번 다녀온 미주교포들은 2차ㆍ3차 북한을 방문,북쪽 가족들에게 컬러TVㆍ재봉틀 등 한살림 장만해주고 5천∼1만달러 정도의 생활비도 주고 온다. 1만달러를 줄 경우 북측 가족에게는 20년 노임에 해당하는 거액이 된다.
북한당국은 방북 해외교포가 3백달러만 내면 체류일에 관계없이 일체의 숙식과 교통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북한당국의 한 관계자는 『앞으로도 재외동포 유치사업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귀띔했다.
한달 동안 북한에 머물면서 기자가 목격하거나 당사자들로부터 직접 들은 사연들은 이산가족문제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말해주고 있다.
재미교포 이수철씨(65ㆍ함북 북청출신)의 경우 결혼 직후인 6ㆍ25 당시 25세때 단신 월남,서울 동대문시장 옷감가게에서 일하다 주위의 권유로 재혼했으나 미국으로 이민간 덕분에 40년 만에 북한을 방문한 케이스.
당시 22세였던 부인 김송암씨가 아들 학섭군을 데리고 친정에 간 사이 피난열차를 타고 남행했었다는 이씨는 범민족대회 기간중 평양에 도착,이산가족찾기 신청서를 접수시키고 8월14일 평양시민 군중대회에 참석한 뒤 오후 10시45분쯤 고려호텔에 돌아오던 중 호텔입구에서부터 일흔살쯤 돼 보이는 한 노파가 자꾸 어깨로 밀어붙이더라는 것.
헤어질 당시 부인의 고운 얼굴만 생각하고 있었던 이씨는 화를 버럭내며 『똑바로 걸으시오』라고 소리친 후 호텔로비로 들어가는 데 계속 아무말 없이 따라오며 어깨로 밀어 『자꾸 왜 그러십니까』라고 한마디 던지고 그 노파를 쳐다보았다는 것이다.
순간 이씨가 『혹시…』하고 표정을 바꾸자 노파는 한마디 말도 없이 팬 주름살 사이로 눈물만 쏟고 있었다.
『너무 기가 막혀 함께 울 수도 없었습니다.』 이씨는 이날 부인과 헤어진 뒤 범민족대회 행사를 마치고 8월24일 부인이 살고 있는 향리 북청으로 갔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 안내원을 따라 그 여자가 살고 있는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날 밤 작은방에 안내원과 아들,그리고 친척들이 함께 자는 방에서 서로의 숨소리까지 다 들리는데도 그 여자를 안고 온몸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기자에게 여기까지 설명하던 이씨는 복받쳐오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여러차례 말을 중단하면서도 너무 기가막혀서인지 얼굴은 웃었다.
○눈물의 호텔로 불러
『온몸과 피부가 거북이 등인지,악어가죽인지 분간이 안될 만큼 울퉁불퉁했습니다.
그 여자는 갓난아기였던 아들을 40대 어른이 될 때까지 어렵게 키우며 시어머니(작고)까지 모시는 동안 몹쓸병에 걸려 온몸에 부항을 놓은 자리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씨는 울면서,또 얼굴은 웃으며 계속 말했다.
『그 여자도,아들 학섭이도 외모에선 도무지 기억할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옛날 마누라,그리고 자신의 아들이라고 합디다.』
이씨는 자신만 재혼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지 계속 부인을 「그 여자」라고 표현했다.
『나는 통일을 원치 않습디다.』
그토록 「통일」 「통일만 되면」 했는데 이제 통일이 되면 큰일이라는 생각뿐입니다.』
그날 저녁 기자는 죄인처럼 이씨에게 왠지 미안했다. 그리고 북한소주 「평양술」을 대접하며 장시간 이야기를 들었다.
『아들 학섭이는 끝내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울지도 않다가 북청을 떠나는 날 처음으로 눈물을 보이더군요.』
이씨는 그동안 자신이 전사자로 처리됐으나 주위의 권유에도 재가하지 않고 기다린 부인이 『남편이 나타난 것보다 학섭이에게 아버지가 나타난 것이 훨씬 더 기쁩니다.』고 말해 더욱 가슴을 에었다고 했다.
고려호텔 종업원들은 호텔에서 이씨와 비슷한 해외교포들의 가족상봉이 이어지자 『눈물의 호텔』이라고 불렀고 『이 비극은 미국놈 때문』이라는 섬뜩한 규탄도 잊지 않았다.
또 다른 재미교포 김모씨(67ㆍ함흥출신)는 재혼한 새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30)과 함께 평양을 방문했다.
부인은 이미 죽었거나 자신처럼 당연히 재혼했을 것이라고 생각,조상에게 성묘라도 하고 딸에게 이복오빠를 연결시켜주기 위해서였다.
북한당국의 주선으로 시골에서 아버지를 찾아 8월19일 호텔로 온 아들(46)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엎드려 아버지께 큰절을 끝내자마자 아버지의 손을 잡고 사람들 뒤편에 혼자서 있는 백발의 할머니곁으로 데리고 갔다.
김씨는 부인임을 직감한 듯 『재혼? 재혼?』이란 말만 되풀이했다.
『아직까지 기다리고 있었소?』라는 뜻이었다.
○범민족때 36명 상봉
고려호텔 로비는 또 한차례 숙연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할머니는 눈물로 뒤범벅이된 얼굴을 세차게 흔들었다.
잠시후 함께 온 딸이 아버지를 떼놓기 위해 달려들었다.
『우리 엄마는 어떻게 하고…』라는 외마디소리를 지르며 아버지를 데려간 후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옛부인 할머니는 두번째 생이별을 당한 채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줄곧 로비안을 돌아보면서 호텔문을 나섰다.
주위에선 그 딸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다른 재미교포들은 『딸을 이해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고 이를 지켜보고 있던 안내원과 호텔종업원 등 북한사람들은 『비정의 인간』이라고 맞섰다.
이날 남과 북은 또 한차례 대립의 순간을 연출했다.
북측 범민족대회기간중 북한을 방문한 해외동포 36명의 이산가족 상봉은 한결같이 피눈물 나는 사연투성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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