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대책 없이 홍보에 급급(UR농업협상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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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서툰 선진국행세 이젠 자중할때/범정부적 지원책 수립ㆍ검토 마땅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의 여덟번째 다자간 무역협상인 우루과이라운드 농산물협상은 그 탄생배경부터가 강자들의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세계적 식량부족시대인 70년대에 크게 호황을 누리던 미국등 농산물수출국들은 80년대에 들어서 모든 나라가 식량증산에 박차를 가해 국제시장이 과잉되자 막대한 재고와 각종 보조금의 경쟁적 지급으로 천문학적인 재정적자에 허덕이게 됐다.
다국적기업들(메이저)역시 저조한 판매고와 낮은 가격으로 연속 적자경영에 시달려야 했다.
미국의 86년중 농가소득 및 가격지지 예산은 2백60억달러(약 20조원)로 지난 6년 사이에 무려 9.6배나 늘어났다.
그해 우리나라의 농업보조액은 그 60분의 1도 안되는 3천5백억원이 될까 말까였다. 아무튼 메이저와 동병상련의 입장인 미국정부의 주도에 따라 86년 9월 우루과이라운드가 개시됐다. 다른 한편 한국에 대해서는 5공 정부의 정치적 취약성을 최대로 이용해 쌍무협상과정에서 농산물수입시장을 무려 84%까지 개방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런가하면 미국의회는 80,85년,그리고 90년에도 신농업법(이른바 식량안보법)을 제정하여 자국 농업의 생산수출지원과 농가소득 보장에 만전을 기한다.
그것도 모자라 「슈퍼 301조」라는 초강경 통상법을 만들어 식량부족국가들의 자구노력에 대해서조차 미합중국대통령이 가차없이 보복조치를 할 수 있는 반자유무역적 무기를 고안해 냈다.
그 뒤안에서 미국정부는 다자간 협정인 GATT의 의무면제조항(25조5항)을 최대로 활용,거기에 자국내법과 행정조치의 지원을 얻어 국제경쟁력이 낮은 낙농제품ㆍ축산물ㆍ설탕ㆍ목화ㆍ냉동가공품 등에 교묘히 수입제한을 행하고 있다. 아직도 대한민국은 6ㆍ25이후 황색지대(Yellow Zone)로 분류돼 배나 사과를 수출할때마다 토양비료 생산과정에서부터 수확→포장→수송→가공과정에 이르기까지 미관리가 직접 와서 검사ㆍ승인해 주어야 한다.
그나마 기분 나쁘면 지난해 평택배 수출의 경우에서처럼 기준에도 없는 잔류농약을 핑계로 통관이 보류된다. 황색지대란 인분을 상용하는 미개야만국이란 말과 다름없다.
사정이 이런데도 우리 관료와 관변학자,정부ㆍ여당은 미국등 선진국의 주장에 대해서는 자못 동정적이며 동조까지 한다. 아마도 내심으론 이 기회를 골치 아픈 국내농업문제를 깨끗이 정리해 버릴 수 있는 호기로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껏 UR 당정회의에서 협상이 타결되더라도 농업이 곧 망하는 것이 아니라는 홍보의 중요성을 다투어 강조했을 정도다. 그 「홍보」때문에 UR회의에서 우리 대표가 한국도 개도국이라고 말하면 모두들 비웃는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는 선진국인가. 외제부품과 외제기술에 의존,일본의 대리수출행위나 다름없던 우리의 수출공업은 최근 저조를 거듭해 작년이래 국제수지가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이제 적자국이 됐으니 다시 BOP(국제수지위원회) 18조 B항국으로 환원해야 옳지않은가. 정부가 요란하게 추진하던 OECD(선진국그룹) 가입 시도도 지금은 자중해야 한다.
최근 한국정부를 설득코자 방한한 미측 GATT 조정관 워런 라보렐 본부대사는 UR가 타결되더라도 미통상법 301조는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공언한바 있다. 반면 스위스ㆍ일본 등 농산물수입국가 대표들은 국회동의의 곤란성을 들어 드주의장초안에 크게 저항한다. 우리측 협상대표들은 기껏 소농의 딱한 사정을 들며 애소할 정도다.
최소한 UR에 관한한 우리 국회는 존재할 가치마저 의심받아 마땅하다. 정부나 여당이나 UR협상 타결을 기정사실로 전제한 대책 같지도 않은 사이비대책안 남발할 뿐이다. 벌써 양돈ㆍ낙농ㆍ한우기반이 무너져 내리고 과일ㆍ채소ㆍ주곡 농업마저 위협받고 있는데도 근본대책은 보이지 않는다.
UR에 관계없이 우리나라 농업ㆍ농촌ㆍ농민문제의 현실은 최소 다음과 같은 기본조건이 충족되어야 회생의 한가닥 희망을 기대할 수 있다고 본다.
첫째,타산업 종사자만큼 소득을 높일 수 있어야하며 육체노동의 고통이 더욱 덜어져야 한다.
둘째,소량 다품종 신선한 식품수요에 부응할 수 있는 고밀도 과학적 영농경영과 상품생산체제를 갖출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공세적인 수출농업 육성을 위한 범정부적 지원대책이 대통령주재 아래 정기적으로 수립ㆍ검토되어야 한다.
셋째,농업생산자재(사료ㆍ농약ㆍ비료ㆍ농기계 등) 산업과 생산물의 저장ㆍ가공ㆍ유통과정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이익(부가가치)을 농어민이 나눠가질 수 있도록 농민(단체)의 농업관련산업 참여가 보장되어야하며,외국 농산물의 수입 가공에 따른 천문학적인 판매차익을 농민에게 환원하는 탈정경유착적인 제도개혁을 단행해야 한다.
넷째,농민이 아닌자가 농지를 겸영하는 전근대적인 소작 농업형태를 발본 색원하여 명실공히 경자유전의 원칙이 실현되어야 한다.
다섯째,최소한도 중진국수준의 농업기반(관개ㆍ배수ㆍ경지정리ㆍ농로 등)확충과 기술혁신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여섯째,선진국 농민들처럼 생산비 절감과 생산성 향상에 필수적인 각종 질곡적인 세제 및 관세를 개혁하고 수입대체산업으로서의 응당한 혜택이 부여되어야 한다.
일곱째,농어촌 자녀의 교육제도ㆍ의료보험ㆍ농작물재해보상ㆍ농어민 연금제ㆍ농촌복지후생시설 등에 대한 가시적인 대책이 획기적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끝으로 농어민도 대한민국 국민이며 농어업종사자도 어엿한 산업경영인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풍조를 조성해야 한다.
지금 농어민은 우리도 사람입니까,우리도 대한민국 국민입니까,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는 것입니까,앞으로도 농촌에 남아 계속 농업에 종사하는게 현명한 짓입니까를 묻고 있다. 그에 대한 대답은 높고 높은 곳으로부터 『계속 나를 믿어 보세요』라는 대답에서나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김성훈교수 중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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