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의 소리] 탈출구 없는 만성질환자 가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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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과 사지의 기능이 마비된 딸의 생명선이었던 인공호흡기 전원을 꺼 딸을 사망하게 한 아버지가 구속되었다.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은 지난 6년여간 딸의 생명을 유지하느라 전 재산을 바쳤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심정과 지금 겪고 있을 아픔, 또 그 가족이 지금까지 견뎌온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염치조차 없다. 이는 10월 22일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85% 이상이 아버지의 행위를 이해할 수 있다고 답한 것으로도 증명된다. 문제는 이런 사건들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병원의 중환자실에서는 "더 이상의 치료는 의미가 없으니 치료를 끝내자"는 가족과, 환자를 "포기할 수 없다"는 의료진의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끝이 쉽게 보이지 않는 만성질환자를 가진 가족은 모두 경제적.심리적 고통으로 삶이 흔들리고 있다.

이번 사건을 접하며 대다수는 사회복지를 확대하고 할증료와 같은 현행 의료보험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당연한 생각이지만 현재 우리들이 내는 의료보험료로는 불가능하다. 우리들은 이 비용을 기꺼이 분담할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고 국가는 우리들이 어렵게 지출한 복지비용을 더 효율적이고 생산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전문가 협의를 통한 제도 개선에 나서야 한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라도 당장 개선할 수 있는 점은 없을까. 우선 만성 희귀질환자의 의료비 지출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제도를 갖춰야 한다. 기사에 의하면 환자가 진단받기 전에 들어간 비용도 적지 않았으며 질병 특성상 환자는 대부분의 시간을 병원에서 보냈다. 만약 보건복지부와 같은 공공기관에서 전문의료인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가지고 가족들의 자문에 응한다면 질병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의료비용의 지출은 훨씬 효율적으로 이뤄졌을 것이다. 기왕에 정부가 갖춘 '희귀 난치성 질환자 의료비 지원사업'도 이와 연계시켜 더 활성화하고 해당 질병의 범위와 자격요건도 완화해야 한다.

모든 살림이 탕진되고 나서야 국가가 도움을 주는 현행 제도보다는 가족들의 여력이 다소나마 남아 있을 때 도움을 주는 것이 가족에게 힘이 될 것이다. 이 제도가 잘 운용되기 위해서는 전화번호 안내 114 같은 수준의 단순한 접근 방법을 개발해 국민에게 적극 홍보해야 한다. 또 국민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경우 국가에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만성질환자 가족간호 구제요청'제도도 만들어야 한다. 예산의 뒷받침이 필요하지만 우선 급한 대로 기왕의 가정간호사 제도와 공공 의료기관을 활용하고, 필수 장비 대여비와 생계비 지원 및 가족 구성원의 간호 참여 등을 보다 조직화하면 가족에게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을 고려할 때 최근 복지부 장관의 공공 의료기관 강화를 위한 예산 증액 요구는 매우 시급하고 정당하다.

동시에 이 과정을 중재할 수 있는 전문 사회복지사도 확보해야 한다. 당장 예산을 마련하기 어렵다면 자원봉사 수준으로라도 시작하면서 그 틀을 보완해 가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사회의 참된 공적 부조를 통해 만성 질환자를 가진 가족들이 이번 같은 절박하고 참담한 결정을 하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더욱이 너나 할 것 없이 이런 어려움에 부닥칠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공적 안전장치가 마련된 후라야 우리는 비로소 이 사건의 잘잘못을 따져볼 수 있는 자격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고윤석 서울아산병원 중환자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