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총리회담 지켜본 예비회담 초대대표 김영주씨(일요인터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대화 나섰지만 북은 북”/북 기본전략 불변… 환상 금물/80년엔 우리 정국 안정되자 접촉 거부
첫 싹이 튼지 10년 만에 분단이후 최초의 남북 총리회담이 5,6일 양일간 열렸다.
이번 회담은 사실 80년 1월 북한의 정무원총리 이종옥이 당시 신현확국무총리에게 보낸 한통의 편지로 비롯됐다.
80 2월부터 8월까지 10차례의 실무접촉이 있었으나 양측은 의제에 대한 견해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당시 우리측의 수석대표였던 김영주 전주영대사(67)에겐 이번의 회담에 남다른 감회가 있을 것으로 짐작됐다.
그러나 응접실 유리전면으로 한강이 막힘없이 내려다보이는 서울 한강 하이츠아파트 자택에서 만나본 그의 첫마디는 창밖의 한강만큼이나 차분하고 담담해 조금은 의외였다.
『현직을 떠난 몸이라 그저 신문독자에 불과한 처지이지만 아직까지는 남북대화에 임하는 북측의 기본자세에 변화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과잉기대는 곤란합니다.』
남북대화의 특수성으로 볼때 희망적 관측과 열정만 가지면 된다는 식의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면서 그에 쫓기는 듯한 정부의 태도가 있다면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의 설명도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변화하지 않은 북한의 기본자세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뜻하는 것입니까.
『이른바 남조선혁명론이지요. 그러한 생각을 버렸다고 볼만한 근거가 없어요. 또 한반도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남한 정부뿐 아니라 제 정당 사회단체,한걸음 더 나아가 미국하고도 따로 얘기해야 할 것이 있다는 식의 태도입니다.
우리 정부는 남조선세력의 일부이며 동시에 한반도문제 해결의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 가운데 한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죠. 물론 이번 회담에서 북측이 한 기조연설을 보니 상당히 부드럽게 표현하는 등 세심한 배려를 했다는 인상이 없지않지만 알맹이는 변화가 없다고 봐야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다만 남북한ㆍ미국간의 3자회담등을 강조하고 나서지 않은 점등은 회담을 조금 더 끌고나가겠다는 북측의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남북한 최초의 총리회담이라든가 여러 측면에서 이번 회담이 갖고 있는 의의가 얘기되고 있습니다만.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성과가 없더라도 점차 상호신뢰를 축적해갈 시발점으로서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북이 정치적인 주제로 공식 대좌한 것도 처음이고 또 간접적으로는 많이 알려졌지만 고려연방제 통일방안과 군축안을 우리측 당국자에게 공식 제의해온 것도 제 기억으로는 이번이 처음일 것입니다.』
­80년 실무접촉이 끝내 결렬되고만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표면적으로는 의제절충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저들이 당시 대화에 나섰던 동기자체가 충족될 수 없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대화를 일방적으로 그만두었다고 봐야겠지요. 10ㆍ26사태이후 혼란했던 우리측의 국론분열을 통해 남조선의 혁명역량을 더욱 성숙확대시키려는 의도가 대화공세의 주된 이유였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어떤 형태였든 차차 안정이 이루어진다고 판단하자 더이상 대화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5ㆍ17등 당시의 우리측 사정이 회담진행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말씀이군요.
『그 점이 그 당시 중요한 문제였조. 5ㆍ17후 두차례의 실무접촉은 사실 그 문제에 대한 시비로 일관했습니다. 심지어 회담 시작전 악수를 하면서도 「동포의 피가 묻은 손을 잡는 것조차 부끄럽다」고까지 몰아세우더군요.』
­이제와서 총리회담이 성사된 이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들이 대화를 제의하고 회담에 응한다든가 하는데는 두서너가지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대남선동ㆍ국론분열의도 탐색외에 국제사회여론을 유리하게 이끌어 보려는 것등이었죠. 그러나 이번 북측 대표단이 청와대접견에서 시급한 선결과제인양 거론한 유엔 단일의석 가입등을 볼때 이번에는 급히 해결해야 할 초조한 속사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시기적으로도 유엔총회가 가까웠고…. 물론 동맹국으로부터의 압력도 있었다는 견해에도 저는 조금 수긍하는 편입니다.』
­남북대화를 직접 체험하고 보니 일반외교와는 어떤 차이점이 있던가요.
『내 경험으로만 미루어보면 비공식 절충가능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억지가 많아서 양측의 제안을 종합한 합의가능점은 상정조차 어렵더군요. 회담에 임하는 태도 역시 훨씬 더 경직되었습니다. 개인적인 견해의 피력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죠.』
­외무장관에서 총리까지 서독의 브란트가 펴온 동방정책을 현지주재대사로서 지켜본 경험으로 남북한과 동서독을 비교해 주시죠.
『분단의 경위,국제적 환경의 여건,전쟁을 치르고 치르지 않았다는 대결의 양상,「한민족 두국가」라는 민족적 공감대의 유무등 동서독의 모델을 우리에 적용하는 데는 많은 무리가 있습니다.
특히 동독에는 「남조선혁명론」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또한 양독에 비하면 통일에 대한 열망이 너무 커 명분에 밀린 나머지 현실적인 접근책의 추진을 오히려 어렵게 한다는 측면도 있습니다.』
­남북회담이나 통일논의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떻게 돼야한다고 보십니까.
『일반외교도 마찬가지지만 바람직한 것이 실현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고 가능해도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시말해 국민을 기쁘게 한다고 모두 정책이 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세판단이 대단히 신중해야 합니다. 정세판단은 다수결이나 권위있는 사람의 유권판단,감정에 좌우될 수 없으며 가급적 사실에 근거,객관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결국 우리 국민이 갖고 있는 통일의 숙원에도 부응해야겠지만 가까운 장래에 실현될 수 있다는 식의 환상이나 과잉기대를 불식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아울러 저들의 오판을 방지하고 진정한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정치ㆍ경제 각 방면의 꾸준한 능력 향상 노력을 바탕으로 자신감을 과시해야 합니다. 그래서 남조선혁명론을 스스로 포기케 해야지요.』
강직ㆍ청렴ㆍ치밀한 성품으로 외무부 재직때 부하직원들로부터 「면도날」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던 것처럼 김 전대사는 시종 꼿꼿한 자세였고 말도 아끼는 모습. 그리고 회견후 세번이나 전화를 걸어와 자신의 말을 다듬고 정정하는 것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동백림사건으로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브란트를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통일은 역사의 과제이지 당면의 정책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 자신 독일의 통일이 이렇게 빨리 실현되리라고 생각 못했을 겁니다. 길게 보고 꾸준하게 착실히 노력하는 자세를 갖는 게 중요합니다.』
그는 최근 경쟁적으로 통일이 가까운 장래에 이루어질 듯이 발언하는 정치인들에 대해 은근히 불만을 갖는 눈치였다.
서울대 법대출신으로 50년 외무부에 투신한 직업 외교관이며 김동조차관시절 정무국장(57년)을 지냈고 이동원장관때 차관으로서(65년) 아스팍 창설에 큰 역할을 해냈으며 88년 주영대사로 정년퇴임하기까지 오스트리아ㆍ독일ㆍ캐나다대사를 역임했다.
1남3녀중 막내딸만 미국에서 학업을 계속하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결혼해 따로 살며 부인 윤광옥여사(62)와 외국에 사는 자식들을 가끔 보러다닐 뿐 「직업이 없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이재학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