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 출연 계약 일방 취소 파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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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오후 4시 인천공항. 푸에르토 리코 출신의 미국인 테너 체자르 에르난데스(42.사진)가 어두운 표정으로 입국장에 나타났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는 7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막이 오르는'돈 카를로'의 주역 가수 신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취업 비자를 받지 못해 관광객 신분으로 입국해야 했다.

'돈 카를로'제작자인 예술의전당이 23일 주스페인 한국 대사관에 제출했던 에르난데스의 취업 비자 신청을 하루 만에 철회했기 때문이다. 출연계약서 사본까지 파기해달라고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난달 24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택주 예술의전당 예술감독은 "돈 카를로 역은 더블 캐스팅이 아니라 테너 김재형 한 명이 계속 맡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공연 개막 2주 전에 일방적으로 출연 취소를 통보하는 것은 외국에선 전례가 없는 일. 박명기 대구문화예술회관 관장은 "가수가 극장에 제출한 경력 등을 허위로 기재하는 등 거짓말을 한 경우를 제외하면 일방적 취소는 불가능하다"며 "주먹구구식 국내 관례를 외국 가수에게 적용한다면 국제적 망신"이라고 말했다.

애초에 김재형과 함께 더블 캐스팅으로 돈 카를로 역을 맡기로 했던 미국인 테너 리처드 마지슨은 북한이 핵실험을 하자 한국에 오지 않겠다고 지난달 17일 통보해왔다.

예술의전당은 그 후 마드리드에서 오페라에 출연 중이던 에르난데스를 긴급 섭외했다. 미국과 유럽에서 활동 중인 에르난데스는 1989년 뉴저지 주립오페라에서'라보엠'으로 데뷔했다. 2003년 까다롭기로 유명한 이탈리아 파르마 극장에서'토스카'에도 출연했다.

에르난데스는 1일 기자와 만나 "20년 가까운 오페라 가수 경력에 이런 수모는 처음"이라며 "계약서 상의 개런티와 왕복 항공료, 숙박비 등 경비를 지불하지 않으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예술의전당 이택주 예술감독은"에르난데스가 A팀(7일, 10일) 출연을 고집해 내린 결정"이라고 해명했다. 또 전해웅 예술의전당 공연기획팀장은 "예술의전당이 손해배상을 해줘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에르난데스의 출연을 섭외한 김성규 MCM 유럽 대표는 "에르난데스의 A팀 출연은 계약서에 명시된 내용"이라며 "예술의전당이 계약 수정이나 사전 합의 없이 '원 캐스팅'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고 말했다.

법무법인'한결'의 차병직 변호사는 "정당한 사유 없는 일방적 계약 취소는 손해 배상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대사관에 비자 신청 서류와 함께 제출한 계약서를 파기하려고 했다면 분쟁 발생시 불리한 증거를 인멸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글=이장직 음악전문기자 <lully@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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