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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문법」을 버리십시오/두 총리에 바라는 것/이명현(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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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4일 아침 두동강 난 한반도 북쪽지역 정치지도자의 한 사람인 연총리가 남쪽지역 정치지도자의 한 사람인 강총리와 더불어 말을 나누기 위해 군사분계선을 넘어 서울에 왔다. 남북의 책임있는 정치지도자가­비록 최고정상은 아니더라도­군사분계선을 사람들이 뚫어지게 보는 앞에서 넘나들며 이야기를 서로 나눌 수 있게 되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번 일은 매우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말을 서로 나눈다는 일이야말로 사람다움의 가장 핵심적인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동물의 하나인 사람도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날카로운 손톱과 발톱 그리고 이빨로 물고 뜯는 물리적 투쟁을 할 수가 있다. 물론 오늘의 사람들은 손톱과 발톱 그리고 이빨 대신에 온갖 최첨단 과학기술을 동원해서 제조해낸 최첨단 무기로 가공할 전쟁을 할 수도 있다.
○흐뭇한 남과 북의 만남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한 싸움이 가져다 주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6ㆍ25전쟁을 통해 뼈아프게 깨달았다. 더욱이나 한 형제끼리,한 동네 친구들끼리,그리고 한 학교 친구들 끼리 서로 총을 겨누며 죽이고 죽는 저 전쟁놀이가 얼마나 처참하며 허망한 일인가를 이 땅의 나이깨나 먹은 세대는 너무나 절실히 체험하였다. 그것은 무엇의 승리도 아닐 뿐 아니라,설사 그것이 승리라는 이름의 것일지라도,도대체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인가를 의심치 않을 수 없다.
이제 두 총리들이 마주앉아 여러가지 말을 주고받을 것이다. 달콤한 말을 주고 받는다면 얼마나 좋으랴마는 그렇게만 되지는 못할 것이다. 갑논을박,아니 더 나아가 설사 얼굴을 붉힌 채 책상을 치는 일이 있더라도 마주보며 말을 주고받는 한,이 땅의 사람들은 박수를 보내야 한다. 말을 주고받는 동안은 사람이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이성적 존재임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싸움은 사람을 죽게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북한땅 고향사람들 끼리 오랜만에 만났으니 처음부터 얼굴이야 붉히지 않겠으니 더욱 우리 마음에 흐뭇하다.
어쩌면 두 총리는 똑같이 역사무대 위에 선 비극의 배우들인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지난 백년동안의 역사는 한반도 사람들에게 비극 그 자체였다. 오늘 두 총리의 마주앉음은 그 비극 후반의 한 장면이다.
조선왕조의 끝머리에 한반도는 힘센 나라들의 각축장이 되었다가 그 가운데 승자가 된 일본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노예의 삶터가 그후 35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나서 2차대전의 승자들에 의해 두 동강이가 났다. 그리고 한 형제끼리 칼부림까지 했다. 그리고나서 가시철망을 사이에 두고 서로 없는 돈,있는 돈 다 털어 총칼을 쌓아놓고 37년이나 전전긍긍해 왔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이 우리를 이처럼 만들었는가고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결정할 수 없었던 우리 자신이 놓여있던 과거의 조건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조건들 가운데는 강자들의 부도덕성,지정학적 위치가 우선 손꼽힐 수 있겠지만 우리 자신의 우둔함도 결코 빼놓을 수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어제가 아니라 오늘이다. 오늘 인류의 역사는 이제 대전환의 갈림길에 서 있다. 이제까지 인류의 삶을 지배해온 삶의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때다. 인간의 삶의 기본적인 관계인 자연과의 관계,인간과 인간들사이의 관계,인간 자신에 대한 관계가 바뀜으로써 새로운 문명이 태동하려는 때가 바로 오늘이다.
○철망을 사이에 둔 37년
우리의 분단의 비극은 어제까지 인류의 삶을 지배해온 자연과의 관계,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토대해서 생겨난 구시대의 마지막 유산이다. 그 유산 가운데세도 가장 쓰라린 환부다. 우리가 만일 사라져가는 어제의 문명의 잔해에 푹 파묻혀 떠오르는 새로운 문명의 태양을 위해 오늘을 준비하지 못한다면,우리의 운명은 어제의 비극의 주인공으로만 끝나지 않을 것이다.
두 총리에게 한반도의 한 사람으로서 간곡히 부탁의 한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좋으니 제발 어제의 문법만은 되풀이하지 말기 바란다. 어제의 문법에 갇혀있는 한은 아무리 만나도 새 세상은 결코 만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몇 차례의 여러가지 형식의 만남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제의 문법에 따라 짜인 전략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기에 번번이 속빈 강정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솔직히 말해서 두쪽 모두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통일은 하나의 정치구호에 그쳤으며,그 구호는 대내외 정치술수를 위한 분장도구로 사용되었다. 또한 통일지상주의까지 있었으나 그것은 보통사람들의 가슴을 울리지도 못했다. 분단은 분명히 우리의 비극이긴 하지만 모든 악의 원천으로 치부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지구위에 분단되지 않은 나라 가운데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문제투성이ㆍ모순투성이 나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으며,얼마전까지 분단의 비극을 머금고 살아온 서독과 동독은 각기 속한 진영가운데 비교적 문제가 적은 나라들의 상위권에 속해있었기 때문이다.
○차근차근 통일로 가자
물론 우리에게 통일은 기필코 이루어져야 할 엄숙하고도 중대한 과제임은 말해 무엇하랴. 문제는 어떻게 이루어내느냐에 있다.
여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속임수 없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일이다. 그럴듯한 관념의 엮음에 의해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무시하려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세상 일은 더욱이나 중대한 일일수록 성급한 마음을 다스리지 않고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우리 모두 마음에 새겨두어야 한다. 이번 두 총리의 만남이 통일의 대장정의 첫 걸음만이라도 된다면 우리 모두는 박수를 보내는데 결코 인색할 수 없는 것이다.<서울대교수ㆍ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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