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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꾼주미경의자일끝세상] 잠든 숲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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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갔던 길에 설악녹색연합 대표인 박그림 선생을 찾았다. 마침 산양 지역에 설치한 무인 카메라 필름을 바꾸러 간다는 얘기에 그저 차 한 잔 얻어 마시려던 생각을 바꿔 따라나섰다. "왕복에 한 댓시간 걸립니다." "넵!" 하루 등반이 보통 여남은 시간이니 댓시간이면 일도 아니다.

박 선생, 예티산악회 공종철 대장과 함께 사람들이 열지어 오르는 등산로를 빗겨나 휴식년제로 잠들어 있는 숲으로 들어선다.

몇 발자국이나 갔을까? 무슨 울타리를 둘러놓은 것도 아닌데 이 쪽은 어찌 이리도 다른가? 수런대던 소리들이 일시에 잦아들더니 고요한 가운데 새 소리와 나뭇잎 스치는 바람소리만이 투명하게 울려온다. 나뭇잎들이 막 빛깔을 갈기 시작한 가을의 숲 속, 계곡의 초록빛 투명한 물 위론 갈색 낙엽들이 가지런히 떠 무늬를 짓고, 지나간 큰 물에 말끔히 씻겨 엎드린 바위 등에는 하얀 햇살이 눈부시게 부서진다.

어깨만 스쳐도 탁 부러지는 마른 나뭇가지들을 피해 숨죽여 걷는다. 숲은 깊어지고 이끼류와 양치류들이 싱싱한 초록빛으로 뒤덮여 있는 너덜을 지나노라니 길가에 지천으로 널린 건 다래.도토리.가래 같은 산열매들, 산짐승들의 먹이다. 사람 발길에 다져지지 않은 땅의 흙은, 밟으면 폭신할 정도로 숨쉬듯 부풀어 있다.

그래봐야 여기까지는 도입부에 불과하다. 두어 시간 걸었을까? 야트막한 능선을 하나 넘으니 또 다른 세상이다. 양 팔로는 턱도 없는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우뚝우뚝 늘어선 서늘한 숲 속에, 하늘을 막아 겹겹이 무성하던 나뭇잎들이 낙엽되어 떨어진 사이로 햇빛이 조각조각 내려 앉는다. 가파른 둔덕 하나를 넘어 둥치 굵은 나무들에 둘러싸인 우묵한 공터에 수북이 쌓여있는 산양똥(사진) 앞에서 그만 넋을 잃었다. 짐승들의 공간이다. 온 몸에 스며드는 이 신비하고 경이로운 느낌은 여기에 서려있는 그것들의 기운이다. 우리가 잃어온 것이 무엇인지 그제서야 알아졌다.

나무에 매어놓은 무인 카메라의 필름을 갈아 끼우는 선생의 이마에 파인 주름이 진지하고 숙연하다. 큰 폭으로 넓은 지붕을 이루며 자리잡은 코발트빛 커다란 바위 아래는 산양.족제비 같은 짐승들의 쉼터다. 카메라에 찍힌 그 놈들의 모습을 선생의 컴퓨터 화면에서 보았다. 공 대장이 바위를 찬찬히 살펴보다 말한다. "볼더링(바위를 로프 없이 신발과 초크만을 사용해서 오르는 것)하기 좋은 바위인데요." 맞다. 지붕을 거슬러 곧장 치켜올라간 바위의 형상은 높이도 맞춤하고 제법 난이도가 나오는 볼더링 바위로 제격이겠다.

하지만 여기에 우리 같은 바위꾼들이 모여든다면? 안 될 말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지 못한다 해도 남겨둬야 할 곳이 있는 법이다. 아니 이런 곳의 존재 자체가 우리가 누리는 것이 아닐까? 한나절 발길을 놓고 돌아와 다시는 가지 못한다 해도 그곳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한 번 가보지 못했다 해도 여기저기에 존재할 그런 곳을 떠올리면 다시 마음이 흐뭇해진다. 산이 그토록 아름다운 건 바로 그런 곳들로 인해서일지니.

주미경 등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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