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의 8ㆍ15」가 필요하다/이호재(광복절특집 논단: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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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오만한 「군사적 승자」되려말고/남북협상하다 스러져간/김구ㆍ여운형 중간지혜 배우자
요즈음 「좋은」 통일안들이 매우 빈번하게 발표되고 있다. 그때마다 우리국민들은 깜짝 놀랄 뿐 아니라 혹시나 해 흥분까지 한다. 「7ㆍ7선언」,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남북경제협력을 위해 북한으로부터 오는 항공기ㆍ선박등과 물자의 제한없는 허용,「7ㆍ20 민족대교류선언」,그리고 북한의 남북한 사회의 완전개방과 자유왕래 제의,5ㆍ31 새로운 군축제안등이 우리 기대를 높여준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남북한관계는 아직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 더욱 전에 비해 더 심한 선전전쟁이 우리들을 현혹시켜 방향감각을 잃게 하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반복되기만 할까. 왜 이산가족 상호방문ㆍ서신교류 같은 쉬운 것을 시작도 못하며 누가 TV와 라디오 상호청취를 허용하지 못한다는 것일까.
어쩌면 남북한에 각각 아직도 『자기 쪽이 꼭 이겨야겠다』는 냉전적 생각과 자세를 못버리고 있는 데 근본적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닐까. 통일은 쌍방이 지금까지 약점과 장점을 있는 그대로 서로 감수하면서 승자와 패자의식을 극복하고 무조건 합치려고 할 때 가능한데,우리 남북한은 아직 그런 결단과 신뢰가 전혀 없다.
승자와 패자의식이 지배할 때 서독과 동독간에 통일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며,유럽국가들도 「하나의 유럽」으로 통합될 수 없을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평화통일도 우세한 쪽이 열세한 쪽을 통합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통일을 추구하는 당사자들이 그 당장의 승패를 생각하지 않고 통합이 공동이익이 된다는 공동체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기 때문에 이기고 지는 것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의 경우는 민족공동체의식을 내세우면서도 남북관계를 non­Zero­Sum식 계산법에 따라 서로 이기지 않으면 진다고만 생각하고 있으니 현실의 장벽이 무너질리가 없을 것 같다.
더욱 중요한 원인은 남한과 북한의 정부당국자들이 그들 정권의 성립과 합법성에 대한 깊은 역사적 반성없이 계속 오만하게 「유일합법성」을 믿고 있는 잘못에 있다고 생각된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한국과 북한정권은 8ㆍ15 해방이 되면서 미소가 한반도를 분할점령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필요악으로서 성립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의 두개 한국정권은 이승만과 김일성같은 극단파들이 미소간 냉전이라는 현실을 빌미로 그길만이 조국을 구할 것이라는 잘못된 주장이 낳은 결과라는 것이다.
또 그런 극단적 논리가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까지로 몰아갔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남북의 정권은 모두 부분적 정통성만을 가져 도덕적으로 별로 떳떳지가 못한 존재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분단과 전쟁등 냉전시대의 과거 잘못에 대해 민족의 이름으로 사과를 해야 마땅한 존재들이다.
한국이 아무리 놀라운 경제개발에 성공했어도,또 설사 북한이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했다고 할지라도 남북 쌍방은 모두 분단국가의 건립과 동족상잔을 범한 죄를 깊이 인식하고 「죄인」들임을 자인해야 한다. 우리들은 아직 분단국가의 건설에 깊은 죄의식과 반성이 없기 때문에 서로 어설프게 유일합법성을 내세우면서 자기중심의 통일만을 고집하고 있다.
남한과 북한당국자들이 서로 죄인임을 자인할 때 독선과 오만을 버리고 포용력을 가지게 되지 않겠는가. 아직 분단에 대한 철저한 반성없이 통일만을 소리높이 요구하고 있으니 어떤 결과를 기대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조국의 통일을 위해서는 분단아닌 통일을 위해서 노력하다가 실패해 현실정치에서 사라져간 김규식,여운형,김구같은 중간파지도자들을 먼저 복권시켜야 한다.
그들을 민족의 영웅적 지도자로,또 그들의 중도적 노선을 범민족적 노선으로 찬양되어져야 한다.
민족의 분열과 동족상잔을 막기 위해 좌ㆍ우합작을 추진하고,남북협상을 위해 그들의 정치생명을 던지던 우리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들에 대한 연구와 존경이 너무 없다.
요즈음 남북한은 갖가지 통일제안을 내놓느라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냉전으로 하여 역사에 묻혀버린 중간파지도자들의 정책과 경륜에 많은 통일의 길과 지혜가 담겨져 있다.
우리가 그 보고를 개발하고 있지 못할 뿐인것 같다. 필자는 해방당시와는 많은 것이 변했지만,지금도 남북한은 모두 통일정책의 평가기준을 중간파지도자들의 것에서 찾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이 사실은 민족주의의 정통성과 도덕성을 가지고 있다.
통일을 저해하는 또다른 요인이 남북한의 군사주의에 있다. 즉 남북은 평화통일을 내세우고 민족공동체를 추구한다고 하면서도 남북한의 민족문제를 상대방을 능가하는 월등한 군사력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과거의 관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것도 앞에서 말한 『우리쪽이 꼭 이겨야겠다』는 의식에서 나온 잘못된 행태인 것이다. 그래서 남한과 북한은 현재 군축을 제안하고 있지만 선전전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군사주의가 아닌 복지ㆍ민주사회건설주의가 남북한민족의 제1차적 국가지표가 되어야 한다. 군사력강화 우선주의에 대한 비판과 반성도 매우 약하다.
남북 양정권들이 아직도 군사력강화를 강조하면서 통일을 이야기 하고,군축논의를 위험시하는 것은 큰 모순이다. 민주ㆍ복지사회를 추구한다고 하면서 두개의 남북정권이 다투어 국가예산의 3분의1 이상을 복지아닌 국방비에 투입하고 있는 것은 정권유지를 우선시하는 과거적 행태다.
이상에 지적한 기본문제에 대한 사고의 과감한 전환으로 새로운 출발을 할때 근래 유행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는 통일안들이 의미있는 것으로 훌륭히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새로운 출발」은 지금도 늦지 않을 것이다.<고대교수ㆍ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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