찜통 지하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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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유독 길눈이 어두운 나는 한동안 지하철 기피증이 있었다. 지상에서 내가 통과해 나와야 할 문을 점찍듯 지명하고 지하계단으로 내려가면 미궁 속 같은 출구를 헤매다가 엉뚱한 곳으로 나오기가 일쑤요, 방향이 다른 차를 타서 고생을 하는가하면, 옳게 탔다 하더라도 꾸벅꾸벅 졸다가 하차지점을 지나가 버리기가 그 몇 번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지하철을 아예 타지 않았다.
그러나 내게 약간의 시간적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헤매면 헤매리라」는 결심으로 지하철 문화에 재도전했다. 그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이미 지하철 정기권 애용자가 되었고 서울처럼 교통난이 엉망인 도시에서는 지하철만큼 확실한 교통수단이 없다고 믿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때보다 그 안쓰러운 물난리 뒤에 찾아온 올 여름의 가마솥 더위는 찜통지하철로 이어졌고 이 찜통더위는 서민의 땀을 짜내는 기계로 둔갑해버렸다.
특히 서울 근교 이주민들의 손발이다시피 한 1호선과 2호선은 50년대 피난열차를 연상케 할만큼 콩나물시루열차다. 여기에 냉방시설이 「유명무실」이다. 멀리서부터 찜통 훈김에 시달려온 승객들은 「더위를 먹고 쓰러진 개」처럼 탈진해서 구슬땀만 줄줄 흘리고 급기야 차안은 땀 냄새로 가득해진다.
이때 나는 생각한다. 이 나라 교통행정을 맡으신 분들이나 고위관리들께서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지하철 1호선에 가득한 서민의 땀 냄새를 맡아볼 기회가 있을까‥‥, 있다면 이 땀 냄새를 통해 서민들의 삶에 어린 골 깊은 애환을 공감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어서 냉방이 잘 된 자가용으로 옮겨 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
이러한 소외감은 새로 으리으리하게 지어진 영등포역 앞에 서면 더욱 애틋한 서러움을 자아낸다. 황토빛 대리석으로 번쩍번쩍 광을 낸 영등포역, 그토록 긴 세월동안 영등포를 통과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서민들을 불편하게 했던 이 역사가 어느 재벌 그룹에 의해 완성되었다고는 하나 그 대리석 위용에 안 어울리게 아침이면 쓰레기 더미와 휴지와 담배꽁초로 가득하다.
화장실은 마치 피서철의 고속도로 휴게실처럼 지저분하다. 역 광장에는 아침마다 자기 몸을 추스릴 수 없는 막노동꾼 한 두명이 쓰러져있다.
나는 이 부분을 예사롭게 넘길 수가 없다.
영등포역 광장에 쓰레기와 담배꽁초가 가득한 것은 서울의 금싸라기 땅만 지나다니는 분들보다 수준이 낮다거나 지식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이 역전을 통과하는 사람들이 쓰레기보다 지쳐 있기 때문이 아닐까.
또 한가지 특이한 현상은 자가용을 타고 가던 문화인들(?)도 영등포 부근에서는 차창을 열고 담배꽁초를 부끄러움 없이 내던지는 모습이다.
시원한 냉방 속에 앉아 「깨끗한 서울거리」를 고민하는 분들이 거리에 침 뱉고 담배꽁초 버리는 자에게 4천원의 벌금을 물리기로 결정한 것을 환경행정의 고육지책이라 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서민들의 땀 냄새」속에서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발견할 줄 아는 교통행정의 인간화가 한없이 그리운 여름이다. 【고정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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