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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거짓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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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아돌프 히틀러는 거짓말의 천재였다. 반면 그의 협상 파트너였던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속는 데 천재였다. 속이고 속는데 이만큼 궁합이 잘 맞았던 경우는 세계 역사상 찾기 어렵다.

히틀러가 처음 체임벌린과 만난 건 1938년 9월 15일. 만나기 사흘 전 히틀러는 체코를 공격할 군대를 비밀리에 국경 근처로 이동시켰다. 그래놓고 "체코 주데텐 지역만 떼어주면 평화를 보장하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래야 기습 공격이 성공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체임벌린은 히틀러를 믿었다. 그는 군대를 움직이지 말라고 체코를 설득했다. 야당 인사들이 히틀러를 의심하자 "아주 비범한 인물" "말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누이에게 쓴 편지엔 "히틀러는 자신이 한 말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라고 적었다.

일주일 후 히틀러는 더 많은 땅을 요구했다. 그런데도 체임벌린은 히틀러의 요구를 들어주자며 되레 영국 내각을 설득했다.

"히틀러는 마음이 좁은 사람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 폭력적으로 반응하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그는 존경심을 품고 협상해온 사람을 고의로 속일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몇 달 뒤 히틀러가 프라하를 기습 침공하면서 체임벌린의 믿음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됐다.

정치학자 마이클 핸델은 히틀러 못지않게 거짓말로 재미를 본 인물로 이스라엘의 전 국방장관 모셰 다얀을 꼽았다. 이스라엘은 67년 6월 5일 아랍을 공격했다. 다얀은 사흘 전인 6월 2일 영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3일엔 기자 회견에서 "전쟁을 하기엔 너무 이르거나 늦다"고 했다. 이틀 뒤 기습 공격이 성공한 데는 다얀의 거짓말이 한몫했다.

김정일의 거짓말은 히틀러 뺨친다. 특히 93년 영변 핵 사찰 이후 그의 입에서 발행된 핵 관련 부도수표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그런 거짓말이 통한 데는 체임벌린에 버금가는 짝이 남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반북(反北) 논객 재스퍼 베커는 1년 전 뉴욕 타임스에 "노무현 대통령의 김정일 포용 노력이 한국민을 북한 거짓말의 세계에 빠져들도록 했다"고 썼다.

북한의 2차 핵실험을 둘러싸고 온갖 설들이 나돌고 있다. "추가 핵실험을 할 계획이 없다" "곧 6자회담에 복귀한다" 등등. 미국 등 우방들이 콧방귀도 안 뀌는 이런 달콤한 말을 믿고 퍼뜨리는 데 한국 고위 공직자들이 앞장서고 있다. 아직도 우리 외교안보 라인엔 지도자 동지의 말만 믿고 싶은 '코드 인사'들이 가득한 모양이다.

이정재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