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숙인' 100불…요즘 서울물가 만만찮네

중앙일보

입력

"와 서울이다!" 오랜만에 한국에 왔다는 기쁨도 잠시. 몇해 묵은 꼬깃한 1000원짜리 한장 달랑 들고 공항에 덩그러니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공중전화를 쓰고 싶어도 100원짜리 잔돈이 없어 두리번 거리던 중 눈에 들어온 것은 공항 마트. 목도 마르겠다 음료수나 한병 사고 남은 잔돈으로 전화를 해야겠다 싶어 마트를 둘러보다 할 말을 잃었다. 손에 잡히는 것마다 1000원 짜리 아래는 아예 없었다. 주스들은 달러로 치면 2달러 선이 기본이었다. 음료수값부터 기가 질리기 시작했다.

100달러짜리를 환전했다. 9만 몇천원을 받았다. 10만원도 안되는 100달러의 가치에 왠지 씁쓸한 생각까지 들었다.

공중전화에 동전을 집어넣고 상대방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는데 말만 하려하면 끊기고 또 끊기고. 공중전화로는 휴대폰으로 통화를 감당할 수 없었다.

교통카드에 충전한 1만원은 며칠도 안돼 소리 소문없이 없어지는가 하면 군것질을 한다는 명목하에 마켓을 한바퀴 돌고 나면 계산대 점원의 입에서 나오는 몇만원이 우습다.

마켓에 탐스럽게 쌓은 가을 과일들은 신토불이라서 그런지 입맛을 자극했지만 보통 몇만원을 훌쩍넘는 가격에 집었다 놓았다를 반복해야 했다.

최고의 질과 디자인을 자랑하는 한국 태생 의류들이 가득한 샤핑몰은 신천지와 다름 없다. 여기 저기 보이는 가을 옷들이 나에게 날개를 달아줄 듯 싶지만 가격표를 보는 순간 날개는 커녕 어깨가 축 쳐진다.

맘에 드는 옷 한벌 사려면 10만원 플러스 알파가 현실이다. 현실에 부딪칠 때마다 '서울 사람들은 돈도 많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친구들과 찾은 퓨전음식점에서도 기가 죽기는 마찬가지였다. 메뉴는 보통 1만 5000원에서 3만원까지 다양했다. 그리 비싼 음식점도 아닌데 달러로 치면 1인당 20달러 음식이라고 생각하니 무척 비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렇게 물가가 비싼 서울에서 어떻게 사람을 만나고 여가를 즐기냐는 말에 친구가 한마디 했다.

"요즘 영화 보고 밥먹을 때 제값내는 사람이 어디 있니? 제값 내면 바보지."

그녀는 할인 카드 세개 정도 갖고 있는 것은 기본이라며 잘만 사용하면 영화 외식 하다 못해 화장품까지 할인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약속이나 한듯 친구들의 지갑엔 할인카드 적립카드 여성 전용 카드 등 현금 대신 카드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경제가 꽁꽁 얼어 붙어 생계 걱정에 상인들이 울상 짓고 무엇 하나 쉽게 살 수 없어 소비자 또한 울상 짓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이 틈새를 타서 성황을 맞는 사업들도 곳곳에 눈에 띄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저가 화장품이다.

해외 브랜드 보다는 저렴하지만 저가라 할 수 없었던 국내 화장품 업체들이 앞다투어 저가 화장품 브랜드를 선보이고 있었다.

미샤를 선두로 스킨푸드, 에뛰드 하우스, 뷰티 크레딧, 이니스프리 등 기초 화장품이 만원을 넘기지 않으며 색조 화장품도 부담없는 가격에 구입 가능한 화장품 전문점들이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의 지갑을 열고 있었다.
시선을 사로잡는 깜찍한 디자인에 경제 침체로 우울했던 마음을 녹이는 상큼한 향, 안 쓰고는 못 배길 것 같은 아이디어 상품들을 싼 값에 골라 쓰는 재미는 백화점에 갈 일이 없던 내게 대리만족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뒷골목 식당’들은 아직도 주머니가 가벼운 서민들의 편인 듯 했다.

기본이 1만원인 맛집이라고 소문난 집들을 뒤로 한 채 발길이 멈춘 곳은 다름 아닌 분식집. 김밥 한줄에 1000원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김밥 천국’ 같은 값싼 분식집 또한 인기다. 골목 하나에 몇개씩 들어설 정도로 유난히 많아 보이는 분식집을 보며 한국의 경제가 고가와 저가로 극명하게 나눠지는 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한쪽에선 수십만원짜리 옷들과 수만원짜리 음식점이 즐비하고 네온사인은 꺼질 줄 모르지만 한쪽에선 ‘정말 살기 어렵다’고 아우성인 서울의 두 얼굴을 몸소 체험하고 LA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주중앙 배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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