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만895명 '보은의 이름' 하나하나 새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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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부산 유엔공원을 찾은 방문객들이 새로 조성된 추모 명비 앞에서 묵념하고 있다. 높이 2~4.5m, 폭 60㎝의 화강암판 166개에 4만895명의 이름을 새겼다. 송봉근 기자

국제연합일(유엔 데이)을 하루 앞둔 23일 부산시 남구 대연동 유엔기념공원. 높이 2~4.5m, 60m 길이로 둥글게 펼쳐져 있는 검은 화강암 조형물이 늦가을의 따사한 햇볕에 유난히 반짝였다.

이 조형물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전사하거나 실종된 유엔군 장병을 기리는 추모 명비(銘碑)다. 미국.터키.영국.에티오피아.필리핀 등 17개국 전몰 장병 4만895명의 이름을 새긴 이 비는 유엔공원의 오른쪽 묘역 뒤편에 설치됐다.

이날 유엔공원을 찾은 정미숙(34.부산시 대연동)씨는 "가끔 산책하러 오는 유엔공원에 처음 보는 시설물이 있어 유심히 살펴 보았다"며 "검은 돌과 연못이 잘 정돈된 묘역과 어우러져 유엔공원의 새 상징물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유엔 산하기관인 재한유엔기념공원관리처는 유엔군의 명비가 세워지긴 한국이 처음이며 국제연합일인 24일 공개한다고 밝혔다. 명비는 직경 26m의 연못가에 원형과 일직선 모양으로 설치됐으며, 장병의 이름은 인도산 검은 화강석(인디언 블랙) 판 166개에 국가.개인별 알파벳 순서에 따라 새겼다. 우주를 상징하는 원형은 높이 2m, 폭 60㎝, 두께 4㎝, 직선 모양은 높이 4.5m의 화강석 판을 콘크리트 기둥에 붙여 세웠다. 화강석 너비는 총 60m며, 명비에 새겨진 이름을 일렬로 세울 경우 22㎞에 이른다고 유엔기념공원관리처 측은 설명했다. 연못엔 철모 모양의 돌과 꽃받침을 설치, 전쟁이 평화로 승화되는 의미를 부여했다.

추모 명비를 디자인한 홍익대 환경개발연구원 관계자는 "연못에 추모 명비 그림자와 달빛이 함께 비치도록 만들어 천상에 있는 전몰 장병의 영혼과 지상의 이름이 한자리에 머물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비용은 모두 17억4300만원이 들어갔다. 1600만원은 호주와 뉴질랜드, 남아공에서 기부했고 나머지 17억2700만원은 한국 정부가 부담했다.

지난해 부산에서 열린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 때 공원관리처와 부산시가 각국 정상들이 둘러볼 수 있도록 유엔기념공원을 정비하면서 참전 용사들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명비 조성을 계획했다.

추모 명비를 디자인하고 4만 명이 넘는 전몰 장병의 이름을 확인하는 데 1년이 걸렸다. 전몰 장병은 미국인이 3만6492명으로 가장 많다. 명단을 확인하기 위해 참전국의 주한대사관과 국방부의 도움을 받았으며 명단을 받는 데 짧게는 2개월, 길게는 5개월이 걸렸다. 돌에 새길 원고를 만든 뒤 교정 작업을 네 차례나 거쳤으며 유엔기념공원관리처 직원 4명, 아르바이트생 5명이 2개월간 이에 매달렸다. 공원관리처 직원들은 알파벳 이름 첫 글자만 들어도 어느 참전국 전몰 장병인지 알 수 있을 정도가 됐다고 했다.

이석조 유엔기념공원관리처장은 "지난해 APEC 정상회의에 맞춰 주변이 대대적으로 정비된 데 이어 추모 명비가 설치돼 유엔공원이 평화를 상징하는 기념물로 거듭나게 됐다"고 말했다.

공원관리처는 국제연합일인 24일 오후 6시 유엔군 전몰 용사 유가족 30여 명과 각계 인사 500여 명을 초청, 명비 제막식과 함께 추모 연주회를 연다. 연주회에는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씨가 참여한다.

부산=강진권 기자<jkkang@joongang.co.kr>
사진=송봉근 기자 <bks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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