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ㆍ20 남북 대교류 선언을 보고…/이상우(논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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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통일­정치 아닌 현실이다/뜻깊은 교류 제의 발표시기가 나빠
판문점을 통하여 북한땅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 민족의 염원인 통일은 90% 이루어진거나 다름없다. 보고싶은 사람 만나고,가보고 싶은 곳 가보고 할 수만 있다면 개인으로는 더이상 바랄 것이 있겠는가. 오는 광복절을 전후해 닷새동안 실험적으로 남북한 자유왕래를 실현해 보자는 「민족대교류 제의」에 대하여 반대할 사람은 있을 수 없다.
통일은 정치가 아니라 생활이다. 그것도 아주 적실한 구체적 생활이다. 헤어진 사람끼리 만나고,서로 왕래하고,서로 나누어 먹고 하는 피부와 피부가 맞닿는 생활 그 자체다. 지난 45년간 그 통일을 추상적 정치로 다루어 오면서 진전없는 말싸움으로 세월을 보냈다. 이번 제의는 정치싸움에서 통일을 생활차원으로 끌어 내렸다는 점에서 칭찬을 들을 만하다.
통일의 핵심과제는 남북한에 나뉘어 살고 있는 동포들의 삶의 터전을 하나로 되묶는 것이다. 즉 민족통일이 핵심이다. 남북에 세워진 서로 성격을 달리하는 두개의 국가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국가통일ㆍ정치통일에만 내세우다가 민족통일의 길을 열지 못했었다. 정치를 접어두고 자유왕래를 과감하게 제안한 것은 통일과제의 주객을 바로잡는 일이라는 점에서 환영한다.
이번 제의에서 북한측이 북한동포의 남한왕래를 허용하지 않더라도 우리측에서 일방적으로라도 자유왕래의 길을 열어놓겠다고 한 것은 잘한 일이다. 북한의 대응조처와 흥정하지 않고 해야 할 일 하겠다는 자세가 바람직하다는 말이다. 남북한 사이에는 북히 쌓은 담과 남이 쌓은 담이 있다. 마음의 장벽,제도의 장벽,군사적 장벽,정치적 장벽…. 서로 합의해서 함께 이러한 장벽을 헌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으나 그것이 어려우면 우선 우리부터 하나씩 헐고 북이 준비되는 대로 따라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남북한 사이의 길을 트는 바른 자세다. 북의 대등한 조치가 없더라도 자유왕래를 허용하겠다고 한 것은 잘한 일이다.
구차스럽게 조건을 달지 않은 제안이라는 점에서 이번 제안은 「정치적 연극」이 아니고 진실한 마음의 표현으로 보여 반갑다. 구차스러운 조건을 다는 제안은 제안이 아니라 정치선전에 불과한 것이다. 북한은 우리 제안이 있은 지 불과 여덟시간 만에 콘크리트벽 철거와 보안법 철폐등등의 조건을 붙인 역제의를 해왔다. 아직 북한은 마음을 열지 않고 있다는 표시라고 해석된다.
그러나 이번 제의가 그토록 좋은 내용을 담고 있는데도 왜 국민들은 흥분하지 않는가. 실현가능성에 회의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통일은 현실이다.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유왕래든 교류협력이든 무엇이든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상황을 조성하는 행동이 중요하지,말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독일은 꾸준히 소문내지 않고,또박또박 동ㆍ서독 관계증진을 돕는 행위들을 실천해왔다. 그것이 쌓여 통독의 길이 열린 것이지,하루아침에 베를린장벽이 제풀에 허물어진 것이 아니다. 대만과 중국본토 사이에서는 적십자회담 한번 했다는 소문도 없이 백만명이 오가는 자유왕래가 이루어지고 있다. 20년간 요란하게 회담을 벌여온 우리와는 너무 대조적이다.
실천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선언이 앞서면 국민들에게 환상적 기대만 주게 되고 그 기대는 곧이어 실망으로 발전하여 선언자체를 불신하게 만든다. 통일은 체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몸에 좋은 약이라고 마구 주워먹어도 되는 것인가. 아니다. 통일과업 추진에 있어서도 체계가 서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통일은 무엇이며,어떤 방법으로,무엇을 희생해서 어디까지 추진해야 하는가 등에 대한 기본지침,즉 통일대강이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세워진 후 이 틀에 맞추어 차례차례로 제안도 하고 행동도 실천에 옮겨야 하는데 이번 제의는 너무 성급하게 튀어나온 느낌이다.
연습하지 않던 학생이 갑자기 바이얼린을 켜기 시작하면 틀릴까봐 모두 마음 졸인다. 이번 제안을 들으면서 마음 조마조마해 하는 국민이 많다는 것은 준비가 부족했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또한 제안은 내놓는 방법에 있어서도 이번 제안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토록 중요한 제안이라면 국민의 뜻을 대표하는 국회에서 결의로 뒷받침해준 후에 했어야 했다. 국무회의도 사후에 소집해야 할 만큼 급한 사정이 있었는가.
광복절을 한달도 안 남긴 이 시점에서 서둘러 제안함으로써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나아가 그 진의 자체를 의심받게 만든 것은 분명 잘못한 일이다. 좀더 신중히,당당하게 절차를 밟아 선언을 발표했어야 마땅했다.
통일관계의 선언이나 성명,제안은 세가지 청중을 가지고 있다. 국민과 북한당국,그리고 국제사회다. 이번 선언을 평가한다면 국민에게는 기대와 회의를 반반 섞어 주었다고 할 수 있으며 북한에는 불필요한 자극을 주었다고 보며,국제사회에 대해서는 우리 정부의 「포용력 높은 대북한 자세천명」이라는 긍정적 인상를 주는 데 성공했다고 본다. 한마디로 아주 좋은 내용의 제안을 너무 나쁜 시기에 너무 서둘러 던져 버려 그 효과를 반의 반도 못건졌다고 본다.
한가지 걱정이 있다. 만일 우리 제안이 북에 의해 받아들여져 이번 광복절에 수백만 북한주민이 서울에 쏟아져 들어오게 된다면 그들에게 숙식과 편의를 제공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과연 그러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통일은 정치가 아니며 정치여서도 안된다. 현실이다. 부모와 처자식을 만나겠다는 피맺힌 기다림속에 사는 국민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을 누군가가 정치적 목적으로 저지른다면 그 죄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우리 모두 명심하자.<서강대교수ㆍ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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