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글씨 '가짜'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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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이건무)이 지난 21일부터 열고 있는 특별전'조선 성리학의 세계'에 출품된 글씨 가운데 진위가 의심되거나 연대 표기가 틀린 작품이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 같은 문제 제기는 전시를 본 서지학자들이 관람평을 나누는 가운데 의견이 일치한 부분이다.

이번 특별전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조선 왕조 5백 여 년의 역사와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친 성리학(性理學) 을 오늘의 시각에서 되새겨 보자는 목적에서 기획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다산 정약용의 유묵이라고 내놓은 글씨. 정약용의 글로는 보기 드문 전서다. 이를 본 서지학자들은"다산의 솜씨라고 보기에는 형편없다"는 평을 내리고 근대 중국인이 쓴 글씨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율곡 이이(1536~84) 와 남명 조식(1501~72) 등 대표적 성리학자들의 문집과 편지글, 그림과 글씨 등 2백 여점 자료로 조선 성리학의 흐름과 특징, 역사적 기능 및 의의를 살피고 있다.

이 가운데 진품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꼽힌 글씨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중국 고문의 글씨를 베낀 글씨첩이라는 19세기 유묵과 율곡 이이가 당나라의 재상이 쓴 글을 옮겨 쓴 것이라는 설명이 붙은 16세기 유묵이다.

이 두 점을 본 한 서지학자는 "다산 글씨로 보기에는 잘 모르는 이가 봐도 느낄 만큼 솜씨가 형편없다"며 "청나라 무렵이나 근대에 중국인이 쓴 글씨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율곡 이이의 유묵이라 붙은 글은 도장이나 글씨로 봐서 일제 말기나 1950년대 만들어진 위작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율곡 이이의 낙관이 선명한 유묵. 전문 서지학자들은 이 글이 일제 말기나 1950년대 위작인 것 같다는 입장을 조심스레 내비치고 있다. 진위 규명과 아울러 전문가들의 사전 조언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에 대해 전시 기획자의 한 사람인 서성호 고고부 학예연구사는 "위작이라 지적된 다산 유묵은 '본관품'이라 분류돼 내려오던 것으로 그동안에 지적이 없었던 것으로 봐 진짜로 믿고 내놨다"며 "수십 년 아무 검증 없이 소장돼온 서첩이 잘못된 것이란 전문가들 지적이 일고 있다면 양쪽의 의견을 들어 신중하게 재고하는 것이 중앙박물관이 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한 서지학자는 "현재 중앙박물관에는 서지학 관련 전공자가 없는 데다 전문가들 의견을 구하는 전통도 사라지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유물 감별엔 오래 현장을 지킨 경륜이 중요한데 각 분야 원로들의 눈을 빌리지 않는 건 중앙박물관으로서도 손해"라고 꼬집었다.

이밖에 중앙박물관이 1436년 간에 찍었다고 연대 표기를 한 '자치통감강목'은 어미 끝에 붙이는 새까만 꽃무늬를 볼 때 일러야 1600년, 또는 1700년대 것이라고 서지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또 1794년에 나왔다는 정조편 '주자백선'은 1800년대 중반이어야 맞다는 것이 전문가들 의견이다.

출품작들마다 붙은 설명이 부족하거나 연대가 너무 포괄적인 점도 나라를 대표하는 박물관의 위상에 걸맞지 않다는 의견이다.

이건무 관장은 도록 머리글에서 "이번 특별전의 개최는 2005년 개관 예정인 용산 새 국립중앙박물관에 마련될 역사관의 '종교 사상실'에 전시될 주제와 내용을 사전에 준비.검토하여 보다 완성된 전시를 기하고자 하는 뜻을 담고 있다"고 밝혔다. 그런 만큼 "전문가들의 고증을 들어 출품작들을 재검토하고 의심가는 작품은 과감하게 걸러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서지학자들은 입을 모았다. 전시는 다음달 11일 일부 전시품을 교체하며 11월 30일까지 이어진다. 02-398-5000.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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