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벽화 훼손 부분 "창작 모사"|『월간 미술』 7월호, 「월북 화가 정현웅의 생애와 작품」 특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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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화가 정현웅( 1911∼76년).
지금은 함께 활동했던 몇몇 원로 화가들이나 그를 어렴풋이 기억할 뿐 미술계에서는 잊혀져 가는 「월북 화가」다.
그는 일제시대인 27년, 불과 16세에 선전에서 초입선한 후 44년 선전이 없어질 때까지 무려 19점이 입·특선된 「선전 특선 화가」로 명성을 날렸다.
특히 『소년』 『여성』 『조광』 등 여러 잡지에 많은 삽화·아동화를 남긴 출판 화가로도 유명했다.
그가 북으로간지 만 40년만에 그동안 가리워져 왔던 북한에서의 생애와 작품 활동이 밝혀져 미술계의 관심을 모은다.
납·월북 작가들의 작품은 지난88년 해금됐지만 경비작가의 6·25이후의 행적이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씨의 강남인 재미 동포 유석씨 (50)는 지난 4월 북한을 방문, 10일 동안 친척과 미술계 인사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평양의 조선 미술 박물관을 방문하는 등 그의 행적을 다각도로 취재했다.
『월간 미술』 7월호는 유석씨의 생생한 르포와 현지에서 입수한 사진 자료, 국내 취재 기사 등으로 특집 「월북 화가 정현웅의 생애와 작품」을 꾸몄다.
르포는 정씨의 생애와 작품 활동 외에 북한 미술계의 한 단면이 처음 공개된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북한은 6·25전쟁 당시부터 고구려 벽화와 17세기 이전 작품들의 모사에 힘써왔으며 조선미술 박물관에는 이당 김은호·청전 이상범·고엄 이응로 등 작고 작가는 물론 월전 장우성·운보 김기창씨 등 남한에서 활동 중인 작가들의 작품도 전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씨는 바로 북한이 힘을 기울여온 고구려 벽화 모사의 대표적 작가로 활약했다. 유명한 강서고분의 『현무도』도 모사했으며 수 10점의 모사도가 조선미술박물관에 전시 보관되어 있다.
북한은 이같은 고분 벽화의 모사를 복원의 차원으로 보고 있다. 모사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상대를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훼손된 부분을 연구하고 상상력을 동원해 그리기 때문에 원화 복원의 뜻을 띤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모사도를 창작 예술품으로 높이 평가, 국보급으로 취급하고 있다.
정씨는 6·25 전쟁 당시 서울 조선 미술 동맹 서기장으로 활동하다 9·28수복 때 북으로 갔다.
그는 월북 후 물질 문화 보호 위원회 제작 부장으로 벽화 모사 작업에 주력했으며 미술가동맹 출판화 분과 위원장으로 역사화·삽화·아동화 등 출판화의 1인자로 활약했다.
그는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은행에 개인 구좌를 개설할 정도로 풍족한 생활을 보냈다. 56년 인민 배우인 남궁련과 재혼, 2남 1녀를 두었으며 76년7월 폐암으로 숨졌다.
정씨는 갑오농민 전쟁 등 역사적 사실과 『흥부전』 『토끼전』등 우리 고전을 소재로한 출판화를 많이 그렸으며 『누구 키가 더 큰가』 (63년), 『달맞이』 (66년)등 동심의 세계를 담은 사실적 유화 작품을 많이 남겼다.
유석씨는 이번 북한 방문에서 정씨가 지난 67년 남한의 친구인 이모 화백에게 보내려던 미공개 편지를 입수했다.
이 편지 내용을 보면 정씨의 예술관과 남한 미술에 대한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정씨는 이 편지에서 『4년 동안 고분 속에서 살다시피 하며 벽화 모사 작업을 하다보니「조선 미술」의 찬란한 유산에 매료되어 조선 미술사를 연구하고 60이 넘어 조선화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밝히고 『힘이 넘치면서도 빡빡하지 않고 치열하고 섬세하면서도 번거롭거나 천박하지 않으며 균형이 짜이고 소박·간결하며 담담한 것이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 미술의 특성』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주체성 확립으로 찬란한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민족적 특성과 현대성을 구현해야한다』고 강조하고 『최근 대략 알고 있는 남조선 미술계의 동향을 보면 목적이 없는 형식주의 미술이 조선 사람의 생활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이해할 도리가 없다』고 비판했다. <이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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