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ㆍ25나자 일 총리 “천우신조”/한국전쟁과 일본(특파원코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미 보조 사실상 참전/돈벌이 급급… 「특수」타고 흑자로
한국전쟁 발발 40주년을 맞으면서 느끼는 일본의 감회는 우리와는 다른 차원에서 나름대로 뭔가 있는 것 같다.
기리야마 가사네(동산습ㆍ41)라는 한 소설가는 사회당기관지『사회신보』 (6월19일자)에 기고한 글을 통해 6ㆍ25를 맞는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38선은 일본의 종전이 만들어낸 악의의 역사로 종전을 어머니로 하고 냉전을 아버지로 해 태어난 38선과 상징천황은 쌍둥이다.』
다시 말해 상징천황 아래에서 이루어진 일본의 번영은 6ㆍ25의 대가로 얻어졌다는 논리다.
그러나 한국전을 이렇게 생각하는 일본인은 극히 드물다.
한국전에 돈벌이를 위해 일본인이 참여했다는 사실도 역사속에서 잊혀져가고 있으며 일본이 미국과 다시 손잡기 위해 한국을 어떻게 이용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최근 소련학계에서 새로 나타나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잊혀져가는 역사사료의 재발굴작업에 조명을 맞춘 일본의 한 주간지는 일본인의 한국전참가 사실을 억지로 감추려는 태도를 보였다.(AERA 6월19일자).
이 잡지는 『한국군안에는 구일본군장교가 많이 있었으며 전쟁이 시작되자 많은 재일 한국인이 지원했다. 일본군출신 한국장교 가운데는 이들을 일본병이라고 잘못알고 「이제 안심」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해상안보청장관이었던 오쿠보(대구보무웅)는 『50년 10월2일 미국측의 소해정파견요청을 요시다(길전술)수상에게 보고하자 30여분간 고민하다 극비리에 파견하라고 결재했다』고 증언했다고 『해상보안청 30년사』는 기록하고 있다. 『해안 보안청 30년사』는 당시 상황을 참가함정 25척,연인원 1천2백명,작업중 2척 침몰이라고 기록했다.
50년 10월2일부터 12월12일까지 8주간에 걸쳐 연 46척의 소해정이 출동,인천ㆍ군산ㆍ원산외에도 해주ㆍ진남포를 합친 5개해역에서 총 3백27㎞의 수로와 6백7평방마일의 정박지에 대해 소해작업을 폈다는 기록도 있다.(등원창 『일본군사사』).
일본의 한국전참여사실은 이밖에도 군수물자수송원,특수업무종사자,기타 해ㆍ공군기지역할 및 군수품생산공장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더욱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지난해 10월15일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일본의 한국전특수는 권장 첫해에 계약고 3억2천9백만달러로 시작,그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당시 이 액수는 일본 총수출의 24%,GNP의 3%를 차지했으며 51년에는 5억7천만달러,52년 8억3천만달러,53년도에 8억1천만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한 학자는 일본경제가 이미 52년 태평양전쟁이전(34∼36년) 수준으로 회복되었고 무역수지도 50년하반기에 패전후 처음으로 흑자로 돌아섰다고 분석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요시다총리는 제단앞에 나가 『이것이야말로 천우신조』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일본정부는 지난 17일 안보회의를 열어 91년부터 95년까지의 5개년군사력증강계획을 논하기 시작했다.
총리이하 외무성ㆍ대장성ㆍ방위청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현국제정세를 논하면서 「한반도의 유동적 상황」에 토의를 집중,이미 높은 수준에 와있는 현재의 방위비유지를 강력 요구했다고 전한다.
차기 5개년계획이 끝나는 95년에는 세계적으로 작전범위를 넓히는 군사대국이 될 속셈이다.<동경=방인철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