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수상 오르한 파무크…동서양 경계 터키의 빈곤한 현실 그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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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 지난해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 내걸렸던 자신의 대형 포스터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AFP=연합뉴스]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오르한 파무크(54)는 한국에서도 친숙한 작가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내 이름은 빨강'(민음사)를 비롯해 '눈'.'하얀 성'.'새로운 인생' 등 주요 작품 대부분이 국내에 번역.출간돼 있다. 무엇보다 그는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지난해 5월 열렸던 서울문학포럼에 참가차 방한한 것이다. 그때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터키인처럼 저에게도 한국은 매우 특별한 나라입니다. 한국전쟁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제 이모부도 한국전쟁에 참전했습니다. 터키처럼 전통을 지키는 한국의 모습이 정말 좋습니다. 그러나 터키와 달리 경제적으로 성장한 서울의 모습을 보고 솔직히 많이 놀랐습니다."

◆예상이 맞았다=오르한 파무크는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강력한 수상후보로 언급됐다. 특히 지난해에는 BBC, 더 타임스 등의 영국 언론들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 발표가 일주일 연기된 이유가 오르한 파무크 때문이었다고 일제히 보도하기도 했다.

한림원 회원들이 문학적 성과로는 오르한 파무크를 지지했지만 문학 외적인 문제 때문에 논란을 벌였다는 보도였다. 파무크는 지난해 초 터키의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제1차 세계대전 직후 터키가 아르메니아인과 쿠르드족을 대량 학살하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했고, 결국에 '터키 국민 모독죄'로 기소돼 올 1월 재판을 받기로 돼 있었다.

그럼에도, 올해도 파무크는 가장 강력한 후보로 예상됐다. 영국의 베팅업체 '레드브록스'는 파무크의 수상 확률이 가장 높다고 점쳤다. 업체가 예상한 그의 수상 확률은 최대 3 대 1. 예상 순위가 발표되고서 한 번도 수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치고는 너무 나이가 어린 게 아니냐는 일부 외신의 지적도 있었지만 스웨덴 한림원은 결국 이 터키 작가의 손을 들었다.

◆문학 세계=어렸을 적 파무크는 화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 대학에선 건축과 저널리즘을 전공했다. 그러나 작가로 꿈을 바꿨고, 1979년 첫 번째 소설 '케브네트씨와 그의 아들들'을 발표하며 작가의 길에 들어선다. 이후 85년 발표한 세 번째 소설 '하얀 성'이 '동양에 새로운 별이 떠올랐다'(뉴욕 타임스)는 격찬을 받으며 국제적 주목을 받게 된다. 화가를 꿈꾸고 건축을 전공한 작가답게 다양한 형태의 형식 실험을 작품 속에서 한껏 시도했다.

뭐니뭐니해도 파무크의 대표작은 '내 이름은 빨강'(98년)이다. 시대적.정치적 변화 속에서 번민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예술가들의 삶을 조명한 작품이다. 다큐멘터리를 능가하는 이슬람 회화사의 생생한 기록이라는 평가와 함께, 미술과 예술에 대한 안목과 통찰력이 돋보인다는 찬사도 받았다.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마지막 숨을 쉰 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 버렸다. 그러나 나를 죽인 그 비열한 살인자 말고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소설의 도입부다. 우물 바닥에 누워 있는 시체 '엘레강스'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이 충격적인 구절은, 지금도 전 세계에서 회자되곤 한다. 2000년 프랑스의 최우수 외국어 문학상을 받았고, 2003년엔 인터내셔널 임팩 더블린 문학상을 수상했다. 터키에선 현대 터키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불리고 있다.

◆"나는 터키를 말했다"=한림원은 파무크의 선정 배경을 "문화 간 충돌과 뒤얽힘에 대한 새로운 상징들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파무크의 작품에서 이슬람 문화의 전통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생각은 달랐다. 작가는 지난해 서울에서 아래와 같이 자신의 소설 세계를 설명했다.

"아마도 나는 터키 작가 중에서 동서양의 충돌에 대해 가장 많은 글을 쓴 작가일 것이다. 서양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은 양분할 수 없다. 일상은 어디에서나 똑같다. 동서양 문화의 중간 경계에 있다는 게 바로 터키의 운명이다. 내 문학은 동서양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내 문학의 근원은 터키의 현실을 반영한다. 빈곤한 터키 동포의 자화상이 담겨 있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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